母女 대화속 숨은 상념… 연필 세밀화 같은 소설[시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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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엘리)는 묘한 제목이다.
여행은 두 갈래로 펼쳐지는데, 진짜 여행은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념 여행이다.
삶의 속성이 그렇듯이, 소설도 그렇게 태어난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을 때, 작은 추 하나가 가슴속으로 고요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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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엘리)는 묘한 제목이다. 누군가에게 묻는 말 같고, 혼잣말 같기도 하다. 지문의 가운데 토막 같기도 하다. 지금은 겨울 창문을 내다보다 이따금 내뱉게 되는 말이 되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목소리가 희미한 소설인가 싶었다. 대사마저 지문에 녹여 표현한 방식이 지나치게 수동적인 서술이 아닌가 의심했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인물인지, 인물의 그림자인지 헷갈렸다. 머지않아 내 생각이 오해임을 알았다. 제시카 아우는 연필로 세밀화를 스케치하듯,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쓴다.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 고요하지만 정확한 시선으로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느리게 전진하는 스타일이다. 읽을수록 머릿속에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는 경험, 독자로서 황홀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화자는 어머니와 단둘이 도쿄, 오사카, 교토를 여행한다. 둘의 대화는 일상적인 이야기에 머물지만, 화자의 기억과 상념들은 자유롭고 유연하게 펼쳐진다. 홍콩에서 호주로 이주해 살아온 어머니의 삶과 이민 2세대인 화자의 삶, 그들이 간직한 문화와 새로 몸에 익힌 문화 사이의 거리, 예술과 앎에 대한 화자의 열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장소는 이국이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경험을 낯설게 하는 방식이다. 여행은 두 갈래로 펼쳐지는데, 진짜 여행은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념 여행이다. 현실에서의 여행은 단선적인 시간을 따라 흐르지만, 화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벌어지는 여행은 복잡하게 얽히는 시간, 인생의 지형을 품고 있다. 화자는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숲을 헤매듯 사유한다.
아우는 작가의 말에서 “말하지 않거나 말해지지 않는 건―엄마와 딸 사이에서는 특히나―엄청난 힘과 마찰을 지니기 마련”이라며, 겉으로 발화되는 건 적고 함의가 많은 일부 문학작품과 중국어와 일본어를 오래 생각했다고 말한다. 좋은 소설은 한두 문장, 혹은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삶의 속성이 그렇듯이, 소설도 그렇게 태어난다. 내가 ‘태어난다’고 쓰는 이유는 작가도 소설의 도착점을 모른 채 끝까지 헤매며 더듬더듬 써 나간다고 믿는 까닭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을 때, 작은 추 하나가 가슴속으로 고요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르는 채 나아가야 함을, 정답이 없는 삶의 한순간을 담은 ‘스틸 사진’을 마주한 것처럼 서늘하게 좋았다. 오래된 공깃돌을 손안에서 굴려보듯, 먼 곳을 더듬어가는 기분으로 읽었다. 여러 번 읽으니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에 머물게 된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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