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글과의 생애 엮기
김병익 | 문학평론가
숙제로 작문을 내주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3 때 처음 내 글이 교지에 인쇄된 것을 보았고 고등학생 때 비로소 학생지와 지방신문에 ‘작품’을 발표했다. 문학이라든가 작가라는 것은 어른들의, 그것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분들의 것이고 나는 다만 우등생이어서 으레 내야 할 숙제로 원고지 칸을 글자로 메꾸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 이미 시단에 등단한 시인을 친구로 사귀면서도 글쓰기란 내게 당연히 망외의 직분이었고 그럼에도 버릇처럼 원고지에 끄적거리기는 했다.
내가 문학이란 글쓰기 세계로 발 디딘 것은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도 여러해 뒤였다. 대학 후배지만 일찍 문학판에 뛰어들어 왕성한 열정을 보이는 김현의 유혹 때문이었다. 아니, 그의 덕이라 해야겠다. 사람 사귀는 데 비상한 열정이 있었던 그는 또래 글쟁이들을 모아 ‘68문학’이란 동인지를 발간한다며 그 명단에 내 이름을 나 몰래 불쑥 넣은 것이다. 그 강요 때문에 나는 같잖은 작가론을 썼고 그 글로 나의 문학평론가 입신이 이루어졌다. 반세기 넘어 전의 어리숙한 시절 일이다.
그 후의 나는 ‘문학과지성’이란 이름으로 나온 계간지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하고 1975년 동아일보 사태로 신문사에서 물러나면서는 실업자가 된 나를 위해 그 친구들이 엮어준 출판사에서 일해야 했다. 이때 나는 문학과지성 편집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출판사를 경영해야 했고 사장 노릇이 부끄러워 작품을 읽고 쓰는 비평가로 행세하며 책 읽기-쓰기-내기의 작업을 의무감으로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그 일이 힘들고 무겁기보다 즐겁고 보람 있었던 것은 문지 동인들을 비롯한 많은 문학인, 저자들이 청진동 25평 좁은 사무실에 몰려와 떠들고 나누고 엮는 문학공동체가 되어 지식사회를 향한 유신 시절의 그 억압을 견뎌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광장’의 최인훈 전집을 엮으며 조세희의 ‘난장이’ 연작에 공감하는 글을 쓰고, 황동규 정현종 시집 간행으로 당대의 지식인 작가들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그 억압의 시대에 공감과 토론이 있는 한줄기 숨 쉴 자리를 펴는 보람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서 25년, 나는 2000년의 21세기를 맞으면서 이 새로운 시대는 후배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스스로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집도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로 옮기면서 ‘자유 지식인’이란 멋진 이름으로 자칭하며 한가를 누린 지 이미 사반세기가 되어간다. 물론 점점 줄어드는 책 읽기와 더욱 게을러지는 글쓰기, 그리고 이제 그 힘이 다 닳았음을 자각하게 되는 80대 후반에 이르러 나 자신의 생애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 반성은 부끄러움과 아쉬움만이 아니고 다행히 내 나이를 다독거리며 내가 살아온 시대의 증인으로 자부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우선 이 시절은 민주화가 진행된 시대였다. ‘자유민주공화국’의 명의에도 불구하고 유신시대의 포악한 강제, 군부정권의 독재, 그래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정서와 정신이 고통당해야 했다. 그 현실 속에서 글쓰기와 읽기, 생각과 상상, 표현과 출판의 자유를 위한, 향한 지적 용기는 당당했다. 작가와 저자들은 한계 속에서나마 사상의 자유란 헌법적 명분을 활용했고 네오마르크시즘의 출판을 통해 평등의 이념을 수용하며 이념과 정서의 유연성을 추구했다. 군부 독재 체제 속에서도, 그러니까 정신과 표현의 속살은 활달하게 움직거릴 수 있었고 그것이 80년대의 억압 현실을 벗어나 90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그 실제를 이루며 사상적 학문적 관용과 정서적 생동을 키웠고 세기가 바뀔 즈음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현실에서나 사유에서 활달한 개방 체제로 열어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글쓰기는 이 변화의 시절을 아주 현명하게 추진하고 또 수용했다. 금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서가 밑 거래로 그 책들은 독자들 손으로 전달되었고 미국과 서구로 에둘러가며 현실 비판과 미래 지향의 대화를 풀어갈 수 있었다. 오늘의 출판의 자유, 그 실제가 되는 사상의 자유는 그런 노력 끝에 얻고 이룬 것이다. 우리는 격한 체제 혁명을 치르지 않고도 책과 문자의 자유를 확보해갔다. 그 과정은 돌아보면, 기특한 우리 민주화의 진전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내 글쓰기 생애는 이 난감한 시대적 전개 과정을 내장하고 있다. 신문기자 때 익힌 검열 회피술로 출판사에서 원고들을 직접 교정보며 편집해온 덕에, 우리는 판금 조처를 피할 수 있었고 압수의 손실도 당하지 않았다. 신문기자로 익힌 글 수작으로 그 삼엄한 유신 시절에 마르크스에서 시작하는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경제적 양극화를 부각하는 조세희의 ‘난장이’ 연작들을 간행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시대에 그 다급해야 했던 억압의 시절을 회상하는 일은 즐겁다. 검열에서 피하기 어려운 책을 내기 위해 찾아야 했던 기교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된 이 평안함. 나는 중년 이후 그 평안을 즐길 수 있었고 그걸 만끽하며 내 글쓰기, 출판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삼엄한 세상을 무사히 끝내게 된 것은 그래서 여간 큰 행운이 아니었다. 그런 다행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뜻을 같이한 많은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밀고 당기고 받쳐준 지식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고통과 고난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의 내 노년은 그 다급한 시절의 아슬한 과정들을 감상하는 일로 즐겁다. 굳이 회오나 겸손을 새삼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다. 젊은 한때의 힘든 시절을 돌아보는 느긋함으로 세월과 변화를 음미하며 그 여유를 즐긴다. 이 한겨레 칼럼을 나는 그 연장선에서 내 생애에서 느낀 그 편안한 긴장감, 자유로운 소곳함으로 써왔다. 그러기 10년을 넘은 이제, 그 묵은 글발도, 그 낡은 생각과 분위기도 달라져야 할 것을 마침내, 당연히 깨닫는다. 그동안 내 수줍은 글을 만져 펴주신 한겨레 편집진과 숙맥 같은 그 글들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이 글쓰기를 마치며 삼가 드리는 감사와 감회의 인사는 그 새로움을 향한 나의 소망과 기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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