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인공지능 시대의 수업계획서 단상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지난해를 연구년으로 보내고 오랜만에 봄학기 대학원 수업계획서를 준비하다가 흠칫했다. 내가 아직 만나지도 않은 가상의 학생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매주 논문을 여러편 읽고 그 내용과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는 과제를 챗지피티(ChatGPT)에 맡기는 학생은 없을까? 인공지능(AI) 도구를 활용해 직접 읽지 않은 논문을 요약하고 직접 생각하지 않은 내용을 생성해서 제출하는 학생은 없을까? 매 학기 습관처럼 내주던 과제의 형식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이 시작됐다. 학생에게 챗지피티 사용 여부와 정도를 명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내 의심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더 큰 의심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스스로 작성하지 않은 글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 혹은 인공지능이 쓴 글과 학생이 쓴 글을 교수인 내가 구별하지 못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물론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다. 학생이 제출한 글을 말로 설명하라고 시키면 된다. 글에 관한 질문을 두어개 던지고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면 된다. 하지만 수강생이 적고 글이 길지 않아야 가능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교수가 그런 의심을 하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우습고 그릇된 일이다.
다 쓸데없는 의심과 고민일지도 모르겠다. 학생이 유용한 도구를 익혀 쓰는 것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무조건 금지하기보다는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효율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사용하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도구를 제대로 쓰도록 돕는 것이 새 시대 교수의 역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생이 남들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여 교수가 기대하는 수준의 글을 제출할 수 있다면 괜찮은 일 아닌가. 그것도 학생 역량이고, 학생이 그 역량을 개발하여 성과물을 만들 수 있다면 대학 수업의 기능은 다한 것 아닌가.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물인 글의 내용과 수준일 테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수업계획서에 ‘챗지피티 사용 제한 없음’이라고 쓰려다가 멈칫한다. 학생이 제출한 과제만을 수업의 성과로 여길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수업에서 전달한 지식의 양과 질, 그것이 반영된 학생 과제물의 수준은 분명 수업을 돌아볼 때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정보를 정리하고 생성하는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수업을 통해 내놓고자 하는 것은 더 잘 정리된 정보가 아니다. 우리가 수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는 수업을 통해 변화한 학생이다. 우리는 수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쁘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에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모호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서 명료한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남는 것은 학생이 제출한 글이 아니라 그 글을 제출한 학생이다. 사람을 대신해서 글을 읽고 정리하고 심지어 생성해준다는 인공지능이 과연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다.
돌이켜보면 대학원 교육을 받는 동안 내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 순간이 가장 기뻤다. 지금 보면 다 변변찮은 글이었겠지만 그 글을 쓰면서 내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고 있다고 자각할 때도 즐거웠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챗지피티를 활용해 글을 쓰고 과제를 제출한다고 해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 못한다고 예단할 수는 없다. 어떤 도구를 써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그 경험에서 무엇인가 배우고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챗지피티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내 글이 나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별 진전이 없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려워질 것만 같다. 괜찮은 성적을 받을 만한 글을 제출하면서도 그 글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는 경험을 덜 하게 된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 아니다.
글을 생성하는 인공지능이 대학 수업에 제기하는 문제는 그 글의 수준이나 유창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요약도 잘하고 발표자료도 잘 만들고 글도 잘 쓰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한자리에 모여 읽고 발표하고 토론하고 글 쓰는 일을 연습하는가. 그 과정을 통해 학생과 선생은 어떻게 함께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인가. 나의 수업계획서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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