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생님들 [책&생각]

한겨레 2024. 1.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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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날짜를 잘못 적었다.

2023.1.3. 바뀐 숫자를 바라보며 지난해와 지금 바뀐 게 무엇인지 가늠했다.

나이, 몸무게, 통장 잔고? 숫자는 쉽게 섬세한 결을 뭉갠다.

"인정해요. 전 편애해요." 그렇게 정리된 지의 말은 관계 맺는 나에게도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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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덴마크 선생님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l 민음사(2022)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날짜를 잘못 적었다. 2023.1.3. 바뀐 숫자를 바라보며 지난해와 지금 바뀐 게 무엇인지 가늠했다. 나이, 몸무게, 통장 잔고? 숫자는 쉽게 섬세한 결을 뭉갠다. 대신 이름을 기록하기로 했다. 떠오를 때마다 연필로 사각사각.

처음 만난 날, 눈인사를 나누자마자 루는 물었다. “우리 말 놓으면 어때?” 훅 들어온 제안에 어색하게 답했다. “좋아. 반가워, 루.” 말의 옷을 한 겹 벗은 대화는 가벼웠다. 너에게 영향을 준 만남이 궁금해. 요즘 자주 먹는 반찬은 뭐야? 진지하게 말하다가 웃음 버튼이 눌릴 때면 격식 없이 깔깔댔다. 존댓말로 대화했어도 우리 사이의 존중은 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루가 아니었다면 존댓말에 익숙한 내가 평어(수평어)를 적용하는 법은 더 늦게 알았을 거다. 존댓말이 존중을, 반말이 덜 존중하는 의미로 여겼던 오래된 ‘말’의 오해를 벗겨준 루.

디디는 문자를 보낼 때면 마지막에 덧붙인다. ‘제 문자는 수신 전용이에요. 답장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디디의 문장은 내 묵은 자책을 폭 감쌌다. 예측할 수 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연결된 감각은 안심만큼 피로감과 압박감을 준다. 짧은 안부 문자도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면, 답장이 늦어지고, 그만큼 자책도 커진다. 디디는 기대를 내려놓고 마음 전하는 법을 알려줬다. 누군가에게 연락할 때면 디디의 얼굴을 떠올린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였을지 모르니, 답장에 적정한 때가 있다는 기준을 지운다.

전업 작가인 지는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에서 얽혀 살아간다. 밤공기가 차가워지던 가을, 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지의 글을 읽고 성큼 다가왔던 한 동료가 무엇에 실망했는지 지를 욕하고 다녔다. 그는 지가 동료들을 편애한다며 미움의 근거를 덧붙였다. 그이가 자꾸 미워져서 괴롭던 찰나, 다른 동료가 말했다. “편애하면 안 돼요? 편애해도 되잖아요.” 그 말을 듣고 지는 ‘나는 모두를 사랑할 수 없어서 글을 썼지. 수업에서는 주어진 역할을 하면 되잖아’ 느꼈다. “인정해요. 전 편애해요.” 그렇게 정리된 지의 말은 관계 맺는 나에게도 힘이 되었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다. 정확하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할 이야기를 빚는다. 그때 내 최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페이지마다 채워지는 이름들. 그들에게 꼼짝없이 배운 날을 떠올린다. 정혜선 작가의 ‘나의 덴마크 선생님’에도 이름들이 등장한다. 책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작가의 선생님이다. 한국 대안학교 교사였던 작가는 이유 없이 밀려오는 슬픔에 실려, 덴마크 세계시민학교에 입학한다. 다시 학생이 된 작가는 배운다. 아시아 학생들의 엄마 역할을 하지 않는 법을, 언어와 나이 차이에 미리 그은 선을 지우는 법을, 성과 강박을 벗고 무기력해지는 법을, 거대한 폭력의 역사 앞에서 작은 실천을 도모하는 법을, 듣는 법을, 돌보는 법을,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질문하는 법을. 삶이 하나의 연극이라면 익숙한 대본을 버리기 위해서는 낯선 이야기를 건네는 선생님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세계시민학교라는 무대가 들려준다. “이 교실에 있는 우리들은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을 거야.(37p)” 문장을 바꿔 읽는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 속한 우리들은 살아남은 너의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을 거야.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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