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초월성’은 ‘주체의 탈중심화’와 어떻게 만나는가 [책&생각]
‘존재-신학’ 비판으로 유신론 갱신
기독교 신의 초월적 신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주체 통합
초월과 자기-초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레비나스/키에르케고어까지
메롤드 웨스트폴 지음, 김동규 옮김 l 갈무리 l 3만원
19세기 이후 서구 사상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가 세속화 곧 탈기독교화다.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 같은 이들이 탈기독교화를 이끈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이 ‘의심의 대가들’이 이끈 세속화 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를 낳았다. 탈근대주의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 또는 주체중심주의 비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세속화 운동의 극단에서 역으로 종교적 영성의 복권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운동의 선두에 선 사람 중에 미국 철학자 메롤드 웨스트폴(84)이 있다. 종교철학에 관한 여러 저서를 쓴 웨스트폴은 탈근대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종합의 길을 열고 있는데, ‘초월과 자기-초월’(2004)은 그런 종합의 길을 잘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웨스트폴이 주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탈중심화’다. 탈중심화란 개인적·집단적 주체를 중심에 놓는 근대주의에서 벗어나 주체를 타자에게 개방하는 것을 뜻한다. 웨스트폴은 이 탈중심화가 기독교 신앙과 다시 만날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만남이 실현되려면 기독교의 ‘유신론’을 재구성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 발판을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에서 찾는다. 하이데거는 전통 기독교의 유신론을 ‘존재-신학’이라고 명명하고 이 신학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신학’은 이 세계 전체의 궁극 원인을 신으로 상정하는 신학을 말한다. 신을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최고 원인’으로 보는 이런 신학은 인과관계에 따라 사물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웨스트폴은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이 ‘존재-신학’의 대표적인 경우로 스피노자와 헤겔의 범신론을 든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명제로 신을 정의했고, 헤겔은 ‘신 즉 정신’(Gott oder Geist)이라는 명제로 신을 이해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자연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을 초월하지 않는다. 자연 만물이 곧 신이다. 마찬가지로 헤겔에게는 정신이 곧 신이다. 헤겔의 정신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전개하고 실현한다. 이런 신들은 이 세계 자체와 다르지 않기에 인간에게 투명하게 알려져 있고, 그런 만큼 이 신들에게는 ‘초월적 신비’가 없다.
웨스트폴 신학의 핵심은 신이 신다우려면 ‘초월적’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웨스트폴은 신의 초월성을 찾아 6세기 신비주의자 위-디오니시오스,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전적 유신론으로 돌아간다. 세 사람의 신학에 ‘존재-신학’의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두드러지는 것은 ‘신의 초월성’에 대한 사유다. 위-디오니시오스의 신학은 흔히 ‘부정신학’이라고 불린다. 부정신학이란 신은 인간의 통상적인 개념적 이해를 초월해 있기에, 그런 이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신학이다. 이런 부정신학적 태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당신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신은 인간의 이해로는 파악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다. 이렇게 신의 인식 불가능성을 고백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신의 초월성’을 보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다만 아퀴나스는 초월적 신을 긍정적인 진술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그 방법이 ‘유비적 서술’이다. 이때 ‘유비’(analogy)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신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이다. 신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을 한없이 초월하지만, 동시에 둘 사이에는 닮음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개념은 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해준다. 그러나 그런 개념적 이해는 어디까지나 제한된 이해일 뿐이며, 신은 여전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신으로 남아 있다. 위-디오니시오스·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의 ‘초월’을 웨스트폴은 ‘인식론적 초월’이라고 부른다. 신은 인간 인식 너머에 있다.
이어 웨스트폴은 20세기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통해 ‘윤리적 초월’을 이야기한다. 레비나스는 신의 초월성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현세적 형태인 ‘타자의 초월성’을 파고든 사람이다. ‘과부·고아·이방인’ 같은 이웃이야말로 동일성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초월적 타자다. 이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책임이다. 이 타자의 초월성을 천상으로 옮겨놓을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가 생각한 신이라고 웨스트폴은 말한다.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과제이듯이, 키르케고르에게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종교적 과제였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신약성서 ‘마테오 복음’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이 말에 이어 곧바로 예수는 다음 말을 덧붙인다. “둘째는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웨스트폴은 둘째 계명이 덜 중요하기 때문에 둘째인 것이 아니라 첫째 계명에 의존하기 때문에 둘째라고 말한다. “이웃에 대한 그리고 이웃을 위한 나의 책임의 가장 깊은 근거는 신의 명령이다.” 이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시혜적 사랑이 아니다. 웨스트폴은 키르케고르가 쓴 일기의 한 구절을 끌어들인다. “무한한 낮아짐과 은총, 감사함에서 비롯된 분투, 이것이 그리스도교다.”
사랑의 핵심은 ‘나를 낮춤’에 있다. 이 낮춤이 바로 탈근대주의가 이야기하는 ‘주체의 탈중심화’와 통한다. 나를 낮추어야만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벗어남이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자기 초월’이다. 신의 초월을 받아들이고 그 초월적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자기를 초월해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신의 초월성을 핵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유신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화’와 만나게 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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