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란 무엇이고,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책&생각]

한겨레 2024. 1.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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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이후 이른바 기묘사림이라 불리는 개혁파들은 연산군이 어지럽힌 세상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허엽에 의하면 '왕은 백성의 주인이고, 국가는 백성이 의지하는 바'이다.

이어 그는 백성이 멀쩡하게 사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탈하는 것을 막아주는 왕=국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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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그림 \

중종반정 이후 이른바 기묘사림이라 불리는 개혁파들은 연산군이 어지럽힌 세상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개혁책의 핵심은 지배계급과 백성의 도덕화였다. 이 중 백성의 도덕화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개혁파는 백성의 도덕화를 위한 책을 여럿 만들었는데,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황해도 관찰사 재직 중 쓰고 언해(諺解)한 ‘경민편’(警民編)도 그중 하나다. 모두 12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1579년 허엽(許曄)이 왕을 거론한 부분이 없다면서 ‘군상’(君上)이란 한 편을 추가했다. 이것을 읽어보자.

허엽에 의하면 ‘왕은 백성의 주인이고, 국가는 백성이 의지하는 바’이다. 왕은 곧 국가다. 이어 그는 백성이 멀쩡하게 사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탈하는 것을 막아주는 왕=국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왕=국가는 분쟁을 조정하여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차별적 신분사회에서 ‘공정한 판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성은 어떤 존재인가? “백성이 된 자는 왕을 부모처럼 사랑하고 떠받들고, 자식이 된 것처럼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하듯, 그렇게 왕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백성이다! 구체적으로는 ‘평소의 공부(貢賦)를 바치고 요역을 맡는 데 정성을 다하고, 게으름을 조금도 피우지 말 것을 백성의 직분’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백성이다. 전세(田稅)와 공물, 노동을 힘과 정성을 다해 꼬박꼬박 바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평시의 의무인데, 살다 보면 급할 때도 있다. 예컨대 ‘왜구가 쳐들어오거나 북쪽 오랑캐가 날뛸 때’가 있는데, 그러면 백성은 “힘과 마음을 다 쏟아 그놈들을 막고 조금도 피하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곧 군인이 되어 목숨을 내놓고 싸워 왕을 지키라는 말이다. 이뿐이 아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거나, 국상(國喪)이 나면 정중한 마음과 태도로 필요한 물자를 바쳐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원한(怨恨)의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왕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역시 백성은 끽소리 말고 세금과 노동, 목숨을 바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만약 공경하는 태도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죄의 대·소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오직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이 말처럼 ‘경민편’의 나머지 12편의 글도 대부분 복종의 윤리와 엄혹한 처벌법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처벌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을 복종시킨 것은 잔혹한 형벌이었다.

왕은 오직 지배하고 수탈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반면 백성은 오직 지배당하고 수탈당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조선이란 왕정국가의 본질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글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어보고 싶다. 언필칭 지금의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무엇인가? 또 국민이란 무엇인가?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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