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숱한 사람 죽인 죗값이 금고 4년이라니”

신소윤 기자 2024. 1. 1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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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기업 유죄엔 안도, 형량엔 아쉬움 토로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 유죄 선고를 호소하는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인근에서 열린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와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의 2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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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울고 싶어요. 전체 피해자 5667명 중에 시엠아이티·엠아이티 사용자가 41%라는데… 마음이 굉장히 착잡합니다. 최고형 나온 게 금고 4년이라니, 법정 구속도 안 되고 납득할 수 없어요.”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4년 전 아내를 떠나보낸 김태종(69)씨는 11일 오후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서승렬)가 유해 화학물질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에스케이(SK)케미칼·애경 등 전직 대표와 임직원 13명에게 집행유예 4년부터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옥시레킷벤키저의 전 대표에게 징역 6년형이 나왔던 만큼 적어도 “동일한 결과가 나올 줄 알았”던 그였다. “1800명 이상(정부 공식 인정 피해 사망자는 1258)을 죽여놓고, 말이 됩니까.” 한마디씩 힘주어 말하는 김씨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김씨의 아내 고 박영숙씨는 2007년 10월부터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성분을 원료로 한 이마트 자체 브랜드(PB) 상품인 ‘이플러스 가습기 살균제’를 단독 사용하다가, 2008년 3월 숨 쉬기가 힘들다며 쓰러졌다. 이후 12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20년 8월10일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는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하던 아내의 목을 지켜주겠다며 김씨가 직접 구매한 것이었다.

아내와 함께 교육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판매하는 일을 했던 김씨는 저녁부터 밤까지 프로그램 오류를 잡느라 밤늦게까지 일하곤 했다. 그는 “아내가 먼저 안방에 들어가서 자겠다고 하면, 가습기가 잘 분사되도록 내가 각도까지 맞춰줬다”며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아내가 떠난 지 3년이 넘었지만 김씨는 여전히 “안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 나와서” 잔다. 김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피해의 직접 당사자 뿐아니라 한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며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큰 셈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2년 전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 김씨는 “많은 사람을 다치고 죽게 한 과실치사 행위가 무죄라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판결 전 “(유죄와 무죄) 반반의 결과를 본다”면서도 “재판부에서 검사 쪽 주장을 받아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은 지난 10월 결심 공판에서 두 기업 대표 등에 금고 5년형을 구형한 바 있다.

김씨를 비롯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일단 1심을 뒤집고 유죄 판결이 나온 것에 대해 “다행”이라면서도, 가벼운 형량에 마음속 응어리를 쉽게 풀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 모임, 환경운동연합 등은 이날 오후 서울고등법원 정문 앞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피해자의 규모와 피해 심각성을 볼 때 검찰의 구형량도 솜방망이인데 (선고는) 그에도 못 미쳤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은 이날 법원 앞에서 마주친 홍지호 전 에스케이케미칼 대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에게 강한 항의 표시를 하기도 했다.

이날 현장에 나온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순미(55)씨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15년간 투병생활을 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딸을 위해서라도 “(가해 기업들이) 마땅한 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2007년부터 5년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24시간 산소호흡기를 달고 다녀야 할 정도의 중증 폐질환을 얻었다. 약해진 몸 여기저기서 각종 질환이 발병해, 허리가 주저앉고 몸 한쪽에 마비가 왔다.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도 어려운 형편인데 아산서울병원과 삼성의료원의 11개과를 오가며 진료를 받고 있다. 조씨보다 사정이 좀 낫긴 하지만, 그의 22살 딸도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천식을 앓고 있다.

조씨는 “피해 구제를 위해 (진료) 내역을 뽑아보니, 아이가 이렇게나 병원을 많이 다녔나 싶더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는 ‘엄마가 계속 병원에 가 있고, 너무 위중했기 때문에 자기가 아픈 건 심각한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며 “심리상담 과정에서 아이가 어른들이 책임져야 할 일을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가해 기업이 수십년간 화학물질로 우리 국민에게 온갖 피해를 줬다면 과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이제부터는 정부의 책임을 묻고 가해 기업의 제대로 된 피해자 지원과 배상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별렀다.

지난달 31일 기준 정부 인정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는 총 7891명이며 신청자 중 피해 인정 대상자는 5667명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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