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목소리 “나는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책&생각]
현대사·대가족사 비극 맞물려
‘성소수자 문학’ 한 획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l 민음사 l 1만8000원
“내가 너를 안아 준 적이 있었던가.”(아산)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우는 거야!”(아찬)
“바람이 그녀(아찬)에게 요구한 것은 아들에게 ‘울지 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 문장을 먼저 새겨본다.
이 소설, 조금 고약하고 조금 기괴하다. ‘어머니’의 문학적 정체성과 퍽이나 다른 어머니들의 존재가 가장 큰 요인이다. 일부나마 여성의 도구적 재현도 뒷맛을 남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뭘까. 더 본질적인 이유는 이 기괴함과 불편함의 리얼리티일 것이다. 한번 경험해본 듯, 보고 들어본 듯, 숨 막혀 본 듯, 울어 본 듯한 삶의 단막들. 그래서 제2독을 해보면 소설은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슬퍼져 있다.
모름지기 ‘어머니’는 생명이요, 귀환이며 안식이다. 대만 소설 ‘귀신들의 땅’은 생명의 원천이 생명을 부정하는 데서 비롯하는 어느 대가족의 지독한 수난사다. ‘귀신’은 내쫓는 자이고 내쫓기는 자다. 왜일까. 이승의 서사에 발이 엉켜 허우적대는 자들로 해석해본다. 들어달라는 거다, 하지만 누군간 감추고 싶어하리. 작중 가족 구성원들의 비밀은 모조리 비극이자 자명한 현재다.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말대로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끝내 파국과 나락으로 치달을 수 없다는 저마다의 집요한 염원 그리고 슬픔이 소설을 떠받쳐 소설을 견뎌내고자 한다.
다음 대목이 강렬했다. 어머니로부터 존재도 존엄도 부정당한 한 살인자의 얘기다. 그는 감옥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하기로 한다. 그에겐 누나가 다섯, 그 아래 형이 또 하나 있다.
“…누나 있잖아, 연극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건데, 나는 애당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오필리어 역을 맡은 남자는 사람을 세 명이나 죽였어. 햄릿을 맡은 다른 남자는 다섯 명이나 죽였대. 그런데 난 겨우 한 명밖에 죽이지 못했잖아.”
“너는 고의가 아니잖아.”
대만 출신 남자가 수감된 곳은 독일이기에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오겠다는 둘째 누이는 마저 듣는다.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아주 긴 독백을 하게 되어 있거든. 전부 독일어로 말이야. 누나들이 관중석에 앉아 있는 걸 보면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야. 그러면 어떻게 공연을 할 수 있겠어?…”
이미 막은 오르고, 배역은 난처하고, 관객은 선택할 수 없으며, 하물며 어떤 관객들은 저 긴 독백을 무료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르지 않을 수 없고 실연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무대라는 삶.
가족은 기댈 만한가. 누이는 가족의 안부를 묻는 동생에게 속으로 말한다. ‘(우리) 다섯 자매는 낳기로 했던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평생 ‘잘 지낼’ 기회라는 게 있었을까?’
국가는 돌아갈 만한가. 살인자는 교도소 도서관 내 유일한 지구본을 아무리 돌려도 자신이 착륙할 땅 대만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누이에게 말한다.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섬, 사내만 사람 취급하는 가족 안에서 그러나 막상 태어나 자라보니 동성애자더란 배역이 바로 1970년대 중후반 대만 용징 태생의 작중 주인공 천톈홍의 것이다. 삶이 필시 올라야 하는 무대인가. 톈홍은 사랑하는 독일 남자의 배신과 죽음 뒤 스스로 또한 죽고자 했으나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역에 충실한 천씨네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이다. 산 채 봉인되어 구천으로 갈 저마다의 ‘긴 독백’들을 작가는 원색적으로 펼쳐 보인다. 일제시대 때 나고 자란 억센 아찬, 내성적인 남편 아산. 이들 부부가 환대하지 않은 다섯 딸들의 한 맺힌 삶, 마침내 태어나 향장(면장급)이 되지만 횡령으로 옥살이한 첫째 아들, 온 가족의 사랑을 받다 중학생 때 동성애가 ‘발각’되어 처절하게 배척되는 막내 톈홍. 특히 엄마 아찬은 마을 제일의 ‘똑똑한 미인’이지만 “읽을 줄을 모르니 만물이 적”인 인물. 읽고 쓸 줄 몰라 쉴 새 없는 그의 말은 때로 부드러운 주술이었다가 찰나 주절주절 사람의 넋을 뺏는 저주가 되었다. 아찬은 엄마가 엄마로부터 받은 엄마로의 폭력을 ‘여성’(성소수자)에게 대물림 중이었다.
톈홍이 애증의 시골 고향 용징을 떠나 작가가 되고 독일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으나 살인죄로 복역한 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소설은 동선 삼는다. 아버지만 ‘귀신’인 게 아니다. 이 경로에서 우린 아홉의 ‘독백’을 바람 소리처럼 듣게 된다. 개인-가족사는 동아시아 특유의 억압적 교육환경, 1970~80년대 고향의 개발사, 나아가 1987년까지 계엄령 체제를 유지했던 폭압의 대만 정치사와 연루된다. 화자들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이 시각과 저 시각을 넘나들지만, 모두 ‘지금’의 이야기로 모여든다.
톈홍을 중학교에서 내쫓는 선생과 집에서 내쫓는 엄마, 그가 사랑한 이들을 체포하거나 죽게 한 국가는 모두가 공범이다. ‘혐의’가 무엇인가. 귀향한 톈홍은 엄마에게 또 듣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들이 신주를 받들어야지. 너는 아들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너는 남자가 아니잖아.” 그럼에도 소설은 탓하고 추궁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첫째 딸 수메이는 노름꾼, 한탕주의 남편이 죽는 것을 보고자 아등바등 살지만 남편은 결코 죽지 않는다. 용징 여학생으로선 유일하게 타이베이대학을 졸업한 셋째 수칭을 일상으로 때리는, 결혼식에 처가 식구 누구도 못 오게 한, 앵커 남편의 위선도 건재하다. 그렇다, 목숨을 끊은 다섯째,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넷째 딸의 비극도 때로 우화처럼 전개시켜버리니 말이다.
대신 작가는 추적한다. 그 엄마에게 진짜 사랑한 이가 있었다는 사실, 무기력한 아버지조차 진짜 사랑한 이가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한없이 섬세하고 다정한 독백을 남기는 아버지의 마지막 실로 놀라운 정체까지, 비밀들을 캐고 캐 지상에서 해원해주려는 듯 말이다. 그래야 자신의 삶도 말이 되기 때문일까.
작가 천쓰홍(48)의 실제 삶을 ‘의역’한 소설로, 작가의 말이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줄곧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운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제 배역으로 더 살아보려는 안간힘이리란 사실이 위로가 된다. 작가의 재능이 쌀알 하나로 소설 한 권을 쓸 법한 말의 마력을 지녔던 어머니의 것이었다는 사실도, 그 ‘이야기하기’가 모두를 (되)살리고 있다는 사실도 위로다.
이제 기사의 첫 세 문장을 다시 보자. 여행으로만 가기엔 대만은 너무 ‘큰’ 나라다. 작중 힘이 되곤 하는 그 가족들의 ‘양타오탕’(음식)이 그 나라에 가면 이 이야기와 함께 떠오르고, 거기 근현대는 이 나라와 어쩌면 그리 닮았는가 새삼 곱씹게 될 것 같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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