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을 모르겠다면 뒤로 가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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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이란 독특한 문학 형식이다.
모든 이야기엔 시작이 있기 마련인데, 그 시작 전에 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나중에야 돌아가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999년에 출간되어 시리즈 순서로는 아홉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첫 소설인 '얼굴 없는 살인자' 속 사건이 시작된 1990년 1월8일 이전에 발란데르가 형사로서 성장해 온 과정을 그린 프리퀄이다.
하지만 다른 선배 수사관들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 수사의 기본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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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헨닝 망켈 지음, 박진세 옮김 l 피니스아프리카에(2023)
프리퀄이란 독특한 문학 형식이다. 모든 이야기엔 시작이 있기 마련인데, 그 시작 전에 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나중에야 돌아가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달리 시간을 되돌린다는 면에서도 재미있지만, 누군가 본편을 읽고 그 전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서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즉, 이미 발견되어 사랑받는 캐릭터만이 전사(前史), 프리퀄을 가질 자격이 생긴다.
헨닝 망켈의 ‘피라미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웨덴 형사 캐릭터 쿠르트 발란데르의 형사로서의 시작점을 그린 작품집이다. 1999년에 출간되어 시리즈 순서로는 아홉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첫 소설인 ‘얼굴 없는 살인자’ 속 사건이 시작된 1990년 1월8일 이전에 발란데르가 형사로서 성장해 온 과정을 그린 프리퀄이다. 1969년 6월3일, 스물한살의 젊은 발란데르는 순찰경관이고 형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우연히도 같은 건물 옆집에서 시체가 발견되면서 현실로 바뀐다. 옆집 노인의 죽음, 자살일까, 살인일까. 현장에서 만난 고참 형사 헴베리는 발란데르에게 사건 수사의 기본을 조언한다. “올바른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배워야 해.”
‘얼굴 없는 살인자’에서 40대의 발란데르는 이미 능숙하고, 어느 정도 사건과 인간에게 지친 마흔둘의 형사였다. ‘피라미드’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에서 발란데르는 스물한살에서 마흔둘까지 점점 나이 들어간다. 경찰을 증오하는 시민들, 불법 이민,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는 사법제도, 암암리에 퍼진 마약, 스웨덴 사회의 불안 속에서 발란데르는 경찰로서 살아간다. 그는 의심하는 법을 배우고, 질문을 통해 단서를 얻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다른 선배 수사관들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 수사의 기본은 이것이다. 미해결 사건의 피해자를 잊지 않는 사람만이 좋은 수사관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려운 수사라도 꾸준히 파다 보면 진전이 있다는 것.
이는 경찰 수사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힘들었던 지난해를 보내면서, 번아웃이라는 말을 많이 생각했다. 달력의 숫자가 3에서 4로 바뀐다고 해도 쌓였던 피로가 하루 만에 리셋되지는 않는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내 이야기는 이미 낡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시작 이전의 시작이 있었다. 실망과 좌절이 있지만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피라미드’의 마지막, 1990년 1월8일, 사건 신고를 받고 도시를 나가던 발란데르는 어두운 바다를 보고 눈보라가 와서 덮치리라 예감한다. 그렇지만 그는 닥칠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2024년 1월, 우리에게도 눈보라는 올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역시 눈앞의 하루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책의 서문에 헨닝 망켈은 이렇게 썼다. “게가 걷는 방식으로 뒤로 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시작으로.” 지금 앞으로 갈 길을 모르겠다 싶으면, 뒤로 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시작 이전의 시작으로. 처음에 사랑받는 캐릭터만이 프리퀄을 가질 수 있다고 썼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캐릭터인 나의 시작을 스스로 되살려볼 수도 있겠다. 그를 기억한다면 또 한해 꾸준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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