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역사 보존과 젠트리피케이션 사이 [책&생각]
역사 경관 보존에 초점 맞춰
여러 도시의 어제와 오늘 살펴
“삶을 기리는 방향으로 보존을”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
정통성 획득부터 시민정신 구현까지, 역사적 경관을 둘러싼 세계 여러 도시의 어제와 오늘
로버트 파우저 지음 l 혜화1117 l 2만4000원
로버트 파우저는 ‘외국어 전파담’ ‘외국어 학습담’ 같은 책을 냈으며 ‘한겨레’에 ‘사회의 언어’라는 칼럼을 쓰고 있는 언어학자다. 그는 또 자신이 살았거나 여행한 세계의 여러 도시를 관찰하고 탐구한 결과를 담은 책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2024년 ‘도시독법’으로 개정증보 출간)를 낸 도시 생활자이자 도시 탐구자이기도 하다.
‘도시는 왜 역사를 보존하는가’는 그의 도시 탐구 두 번째 책으로, 도시들의 역사 경관 보존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 유산을 적극 보존한 로마와 교토에서 시작해 애국주의를 표방한 미국 윌리엄즈버그와 나라(일본), 애향심에 호소한 찰스턴·뉴올리언스·샌안토니오(미국), 사회적 저항이 보존으로 이어진 뉴욕과 베를린,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히로시마와 드레스덴,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런던·파리·이스탄불·베이징·빈을 거쳐 한국의 고도인 경주·전주·서울 편으로 서술이 이어진다.
로마와 교토의 권력자들이 그곳의 종교 유적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에 나선 까닭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18세기 말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비롯한 로마제국의 유적을 복원함으로써 유럽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1408)는 오랜 시간 방치되다시피 했던 일왕의 궁궐을 복원했고 선불교 사찰 쇼코쿠지도 새로 짓는 등 쇠락해 가던 교토의 상징성을 되살리려 했다.
나라는 710년 수도가 되어 일본 고대 국가의 번성기를 구가했지만, 784년 수도가 교토로 옮겨 가고 내처 에도 시대가 이어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롭게 들어선 정부가 근대 국가의 상징이자 일본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 줄 무언가를 찾을 때 맞춤한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나라였다. 1895년 나라 공원에 프랑스식 외관을 지닌 국립 나라박물관이 들어선 것이 근대 국가 서사와 관련된다면, 사슴을 타고 온 신에 관한 전설에 착안해 공원에 사슴을 풀어놓은 일은 국가 정체성을 겨냥한 것이었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 주도였던 윌리엄즈버그는 1920년대에 록펠러 가문의 지원을 받아 18~19세기의 건물 100여 채를 보수하거나 복원함으로써 ‘살아 있는 역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매끈하게 복원하는 바람에 오히려 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무엇보다 18세기 윌리엄즈버그의 주민 다수였던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의 역사를 지웠다는 비판을 낳았다.
미국 남부의 세 도시 찰스턴·뉴올리언스·샌안토니오는 1920년대에 부유층 백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애향심에 근거한 역사 경관 보존 노력이 펼쳐졌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백인들 사이에 ‘옛날’을 향한 향수와 낭만주의가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는 가운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활동을 주도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슬럼화된 역사 지구를 보존 사업을 통해 재생시킨 결과 흑인들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부유한 백인들이 새로 유입되게 된 것은 생각해 볼 문제를 남겼다.
대도시 뉴욕과 베를린은 이들과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문화예술인과 사회운동가, 성소수자, 이민자 등이 특정한 지역에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면서 해당 지역의 난개발을 막는 동시에 새로운 ‘대안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보존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20세기 초부터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와 1940년대부터 문화예술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된 브루클린하이츠, 그리고 서베를린 장벽 아래 빈집들을 대상으로 불법 거주 운동이 펼쳐진 크로이츠베르크가 대표적이다. 그리니치빌리지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무산시킨 항의 시위는 결국 ‘그리니치빌리지 역사 보존 지구’ 지정을 끌어냈고 이는 미국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베를린에서는 정부가 불법 거주자들을 아예 합법적으로 살 수 있게 하고 집 수리를 지원함으로써 불법 거주 운동이 도시 재생 사업으로 전환되는 특이한 사례를 낳았다. 그러나 이 두 도시 모두 일단 보존과 재생이 성과를 거둔 뒤에는 어김없이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돼 집값이 오르고 결국 연예인과 초부유층이 사는 관광지로 변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듯 역사적 경관 보존을 통해 새로운 부촌이 만들어지는 사례는 ‘누구를 위한 보존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드레스덴과 히로시마는 2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로 도심부가 완전히 파괴되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도시는 역사를 보존하고 평화를 기념하는 일에 나섰다. 동독 시절 드레스덴은 연합군에 의한 피해를 강조했지만,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평화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동독 시절 민주화운동에 관한 안내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히로시마 역시 원폭 돔을 중심으로 평화기념공원을 꾸미는 등 ‘평화의 도시’를 표방하지만,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강조하는 태도는 “주변국들은 물론 국제 사회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
21세기 이후에는 역사적 경관 보존과 관련해 비판과 회의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역사적 경관 보존의 대상지는 낙후된 지역이기 십상이고, 보존 노력이 성과를 거두면 대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져 가난한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동성애 권익 운동과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새롭게 역사적 경관 보존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지은이는 책의 결론 삼아 이렇게 제안한다. “국가와 민족을 선전하고, 지난날의 영화를 기념하기보다 주어진 어려움과 한계 속에 열심히 살았던 이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건 어떨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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