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로 내리는 雨·雪…김현철 감성은 여전히 세상을 뒤덮네
"눈·겨울을 소재로 회고적인 정서가 강한 어른의 팝 음악"
우가(雨歌)·설가(雪歌) 연작
18~20일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서 단독 콘서트
"싱어송라이터는 책임지는 사람"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은 음표로 비(雨)와 눈(雪)을 내린다. 여전히 세련되고 도회적인 영감으로 세상을 뒤덮는다.
김현철이 작년 6월 발매한 12-1집 '투둑투둑'이 증명했다. 비(雨)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로 구성한 12-1집 '투둑투둑'은 근사한 "우가(雨歌)"(김학선 대중음악 평론가)였다.
오는 15일 오후 12시 음원 플랫폼에 발매하는 12-2집 '겨울아 내려라'는 그럼 '설가(雪歌)'다. 12-1집 '투둑투둑'에 이어지는 연작 콘셉트 앨범이다.
여름과 겨울, 새벽과 아침 등을 소재로 곡을 만들어왔던 김현철이 비에 이어 눈을 노래했다. 특히 '눈으로 덮인 회색의 도시 풍경'을 그렸는데, 국내 '시티팝 선구자' '시티팝 시조새'로 통하는 그에게 시티팝은 특정 사운드나 분위기의 사조(思潮)를 나타내는 것뿐 아니라 도시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걸 보여준다.
약 3개월 뒤 바이닐(LP)로도 발매될 이번 음반의 타이틀곡 '겨울아 내려라'가 김현철이 막내로 몸 담았던 1980년대 동아기획을 이끈 포크 거장 싱어송라이터 조동진(1947~2017)의 아련한 앰비언트 풍의 자장이 느껴지면서도 김현철만의 도회적인 감성을 머금은 이유다. 조동진의 풍경을 그리는 음악은 김현철에게 이렇게 계승되고 있다.
김현철의 이번 음반 '겨울아 내려라'의 '라이너 노트'를 쓴 김학선 평론가는 이렇게 들었다. "눈과 겨울을 소재로 회고적인 정서가 강한 어른의 팝 음악. 가사부터 악곡, 연주까지 연륜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느긋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음악이고, 십대 시절에 만든 '눈이 오는 날이면'과 오십대가 돼 겨울을 노래한 '겨울아 내려라'와 '외출'을 비교해 듣는 재미도 있다." 다음은 최근 상암동에서 만난 김현철과 나눈 일문일답. 1989년 1집을 내 올해 가수 데뷔 35주년을 맞은 김현철은 여전히 맵시 있는 답변들을 들려줬다.
-이번 음반 콘셉트는 눈(雪)입니다.
"12집은 되게 재밌게 시작한 음반이에요. 우리 밴드와 각종 공연 연습을 해보다가 제 곡 중에 비(雨) 관련 노래가 많다는 걸 알게 됐죠. 원래 있는 비 노래 중에 신곡을 하나 더해 네 곡을 만들어 12-1집을 낸 거죠. 그런데 눈 노래도 신곡 포함 4곡이 되니까 그러면 '12-2집으로 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학선 평론가님이 12-1집에 대해 '우가'라고 표현했는데 12-2집은 그럼 설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현철 씨 음반은 항상 사운드가 너무 좋아요. 각 곡에 맞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엔지니어분들이 계시지만 직접 소통하면서 질감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편곡적인 구상부터 사운드의 개념이 들어가게 되죠. 제가 만들어내고 싶은 사운드를 말로써 설명하기는 되게 힘들어요. 저도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다른 분들의 사운드를 듣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곡 쓸 때부터 그런 사운드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니면 그런 사운드가 나오지 않죠."
-현철 씨는 작사, 작곡을 감당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편곡까지 하시니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요즘 같이 여러 명의 작곡가, 편곡자가 협업하는 구조에선 '나만의 사운드'라는 걸 찾기는 힘든 거 같아요. 갈수록 싱어송라이터의 존재가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싱어송라이터는 '책임자' 같아요. 싱어와 송라이터를 다 한다는 건 '내 음악에 대해선 내가 책임진다'는 뜻이거든요. '나 홀로 여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라는 거죠. 사운드 관련해서도 말로는 못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죠."
-책임이라는 말이 되게 멋지네요.
"제가 음악한 지 35년이 됐는데 그 동안 제 음악에 대해선 제가 책임을 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에요. 사실 살아가면서 각자 많은 책임들을 맡죠. 전 아빠, 남편으로서 책임도 있고 사회 일원으로서 책임도 있고 또 방송을 하고 있으니까 DJ로서 책임도 있고요. 그중에서도 음악은 제일 가장 큰 책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음악적 근간이 분명하니까 예능 등 다른 걸 하셔도 정체성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싱어송라이터 계보를 이어주고 계신 몇 안 되는 뿌리 중 하나 아닙니까? 강변가요제 심사위원,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심사위원도 맡고 폐관 위기에 처했던 국내 소극장 문화의 상징인 학전을 위한 릴레이 공연 프로젝트 '학전 어게인' 무대에도 오르시고요. 1980년대와 199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는 각각 동아기획과 학전소극장이 음반과 공연 측면에서 근사하게 수를 놓았는데 현철 씨는 동아기획 막내입니다. 최근 싱어송라이터 경연대회, 학전 등의 위기에 대해선 어떻게 보셨나요?
"제 입장에서는 많이 아쉽죠. 근데 '여러분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당연히 얘기를 할 수는 없어요. 문화라는 것은 대부분의 흐름이기 때문이죠. 올챙이 한 마리가 강물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겠어요? 다만 흐름에 순응해 가는 사람은 또 순응해가지만 또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해 나가면서 또 새로운 지류(支流)가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씀 들으니까 학전도 폐관 위기에 처했다가 다른 목소리가 나와서 활용 방안이 모아지고 있죠. 그것도 다른 지류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정 사안에 대해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건 하나의 지류가 아니라 큰 강물이 될 수도 있는 거죠. 학전은 우리나라문화의 큰 역사거든요. 그 역사를 잘 기록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도 학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거든요. 또 학전도 옛날부터 쌓아온 연극,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거고요. 그걸 보고 자라난 저희 같은 세대가 있고 또 뒷세대들도 학전을 보면서 잘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학전은 오늘날 제가 이렇게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동기 중 하나가 분명히 됐을 거예요."
-이야기를 다시 앨범으로 돌리겠습니다. 첫 번째 트랙인 차분한 발라드 장르의 '겨울아 내려라'가 타이틀곡입니다.
"겨울 눈이 하얗게 내려서 제 못난 부분을 다 묻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가사고요. 저보고 '어쩜 그렇게 무던하냐'고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전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못된 놈입니다. 저만이 알고 있는 제 모습이 있죠'라고 노래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활하거나 치졸했던 제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게 '새하얗게 내려와서 다 덮어라'고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또 다른 신곡 '외출'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입니까?
"마츠 다카코가 주연한 일본 드라마 '콰르텟'(2017)(최근 국내에서 흥행 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의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가 참여한 작품이다)을 보고 쓴 곡인데요. 어느 날 마키(마츠 다카코)의 남편이 사라져요. 미스터리, 코미디, 휴먼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는 드라마인데 마키는 남편이 사라진 게 아닌 외출 한 거라 생각하죠. 그런 마음을 담음 곡인데 극 중 배경이 된 일본 가루이자와 겨울 풍경도 너무 아름다워요. 이와 별개로 '눈이 오는 날이면',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은 기존에 발매했던 곡을 새롭게 편곡했고요."
-이번 앨범 발매와 함께 단독 콘서트 '겨울아 내려라'(18~20일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도 여십니다.
"우선 12집에 실린 곡들을 편곡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들려줍니다. '달의 몰락' '드라이브' '왜 그래' '일생을' 등 소위 잘 알려진 히트곡도 선보이고요. '물망초' '사랑하오' '그렇더라도' 등 그간 잘 들려드리지 않았던 곡들도 포함했어요. 우리 '김현철의 디스크쇼'(MBC 표준FM 95.9㎒) 청취자분들이 가끔 '물망초' 같은 곡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시거든요. 그리고 콘서트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어차피 음악하는 동안에 계속 콘서트를 할 건데 이전 곡들 포함 다양한 곡들을 들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특히 이번엔 12집 발매 3일 후에 콘서트를 하니까 음반을 다 못 듣고 오실 분들도 있을 거예요."
-이번 12집을 작업하시면서 음악에 대해 환기가 된 부분이 있나요?
"11집까지는 콘셉트라는 게 없었어요. 제 얘기만 담은 건 아니었지만 일기 같은 거였죠. 지난 앨범 낸 이후 이번 앨범을 내기 전까지 제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였으니 무슨 콘셉트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엔 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눈에 대한 이미지요.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 같은…. 눈이 오면 세상이 차분해지잖아요. 밤새 눈이 하얗게 내린 다음 날은 또 왜 이렇게 맑은지….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맑은 날 빛이 쏟아지던 아침을 많이 생각했어요."
-겨울 감성을 담은 음반인데 역시 현철 씨답게 세련된 도시 감성이 묻어납니다. '국내 시티팝의 시조새'로도 통하는데 시티팝은 음악 스타일뿐 아니라 태도와 분위기도 함께 가리키는 것 같아요. 예컨대 음악 자체에서 묻어나오는 청량함 같은 거요.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1집을 낼 때는 시티팝을 몰랐어요.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당시엔 그런 음악을 '퓨전 재즈'로 통칭하고 그랬죠. 청량한 이미지가 시티팝이기도 한데 제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도시에 살고 있고 평생을 도시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연을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 같아요. 그러니까 시티팝은 도시의 지저분한 이미지가 아니라, 도시 속에 들어가서 보는 게 아니라, 하늘 위에서 도시를 조망하는 느낌 같다고 할까요. 미국, 영국 뮤지션들이 예전부터 그려온 그림인 거죠."
-하긴 시티팝은 영미권 AOR('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dult Oriented Rock)' 혹은 '앨범 오리엔티드 록(Album Oriented Rock)'이라 불리며 솔(soul)과 펑크의 기운이 가미된 부드러운 록을 주로 가리킴)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으니까요.(AOR은 1960년대 말께 서구 팝 시장에서 모타운 스타일의 솔과 블루스 음악에 다양한 장르, 전자음악 장비 등이 섞이면서 탄생했다.) 그런데 현철 씨가 AOR이나 시티팝 풍의 음악을 국내에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뮤지션 중 한 분인 건 명확합니다.
"그렇게 말씀주시면 감사하죠. 그런데 음악은 누군가 시작을 했고 또 그전에 누군가 시작을 했기 때문에 흘러내려오는 거예요. 제가 국내 시티팝의 창시자, 시조새라고 말씀들 주시는데 이전에 음악을 하신 분들 덕분에 저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윤수일의) '아름다워'도 완전 시티팝이잖아요. 도시의 감성이 옛날부터 있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재작년 10월에 현철 씨와 윤수일 선생님이 각각 '제19회 자라섬재즈페스티벌'과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2022'에 간판급 뮤지션으로 나란히 출연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이제 이제 페스티벌 섭외가 들어오면 무조건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인 2020년 한·아세안 뮤직페스티벌 '라운드(ROUND) 2020' 회의체 'AKMC' 한국 음악위원으로 나서 캠페인송 '윌 유 컴 시 미 어게인(Will You Come See Me Again)?'의 작사, 작곡을 맡았던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K팝이 세계적으로 대세지만 V팝(베트남팝), T팝(태국팝) 등 아시아 음악이 더 주목 받는 때가 올 거라는 예상이 나오는데 다양성 측면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그래서 싱어송라이터가 꾸준히 나와야 해요. 그 나라의 음악적인 실력이나 문화적인 토양이 단단해질 수 있죠. 조각조각 협업할 수도 있지만 곡을 전체적으로 보고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죠. 싱어의 입장도 알고, 송라이터의 입장도 알아야 이해 충돌이 안 되게끔 작업할 수 있거든요."
-지난해 말 '2023 MBC 방송연예대상'에선 '김현철의 디스크쇼'로 라디오 부문 최우수상도 받으셨어요.
"라디오가 진짜 편해요. 근데 장점과 단점이 늘 함께 해요. 김현철이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제일 쉬운데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최소한 몇 년 이상을 해야 저라는 사람이 보여지고 그 이후엔 거리낌 다 보여줄 수밖에 없거든요. 집안에 무슨 우한이 있다거나 하면 제가 코미디를 해도 라디오 듣는 분들은 귀신같이 그 느낌을 알아채거든요. 그래서 라디오는 (삶이) 무탈한 사람이 좋아요. (올해 34주년을 맡은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DJ인) 배철수 선배님이 그런 말씀 하셨어요. '나랑 너랑은 되게 비슷한 점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무탈한 거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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