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미남 귤’과 ‘미녀 리치’
상큼하고 향기로운 과일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을 ‘과즙미’라는 신조어로 부른 지도 꽤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21세기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과즙미의 시초를 찾아 올라가면 원조라 불릴 만한 두 미남·미녀가 있었다.
과즙 미남으로는 당나라 때의 두목(杜牧·두목지)이라는 시인을 들 수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붉네(霜葉紅於二月花)’라는 구절은 우리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는 소문난 미남이었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이몽룡의 외모를 ‘두목지의 풍채’라고 비유할 정도로 두목은 확고한 미남 콘텐츠를 지니고 있었다. 애주가였던 그는 중국 강남땅의 번화한 풍류 도시 양주(揚州)에서 늘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다녔다. 술 취한 두목이 걷지 못해 수레를 타고 양주 거리를 지나가면, 그곳에 밀집한 기루(妓樓)의 기녀들은 일제히 귤을 그에게 던졌다. 미남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받고 싶어서였다. 결국 두목의 수레는 노란 귤로 가득 차고 귤 향기가 진동했는데 바로 이 장면이 제주도 관덕정에 벽화로 그려져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다른 과즙 미녀로는 당나라 때 양귀비가 그 대표다. 우리 고소설 ‘박씨전’에서 박색 박씨 부인이 허물을 벗은 뒤 그 미모가 마치 양귀비와 같다고 묘사될 정도로 흔히 거론되는 미인 콘텐츠이기도 하다. 양귀비는 하얗고 달콤한 과일인 리치(리즈)를 즐겨 먹었다. 그런데 리치는 부패하기 쉬웠고 수도 장안(長安)은 리치의 산지인 광동과 너무나 멀었다. 양귀비의 미소를 한번 보려고 현종 황제는 파발마를 보내 리치를 급하게 운송시켰다. 국방에 써야 할 군사력을 과일 운송에 썼기에 리치는 당나라를 기울게 한 망국의 과일이 됐고 과즙 미녀 양귀비의 마지막도 좋지 않았다.
두 이야기는 굳이 따지자면 중국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오래 활용된 콘텐츠이기도 하다. 인문 콘텐츠에는 국경도 주인도 없으며 그것을 즐기고 쓰는 사람의 것일 뿐이다. 과즙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천수백 년 전 동양의 두목과 양귀비를 떠올린다면 그게 갑자기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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