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권력을 독점하지 말라”… 도편추방제의 경고장[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권력다툼 부족들 해체하고 재편
클레이스테네스는 영리했다. 나누기와 더하기를 통해 전통적 부족의 세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체 ‘데모크라티아’를 확립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개혁 이후 아테나이에서 ‘시민’은 ‘데모스의 구성원’과 같은 뜻이 되었다. 모든 시민의 이름에는 소속 데모스가 명시되었고 이것이 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또 모든 시민은 데모스의 일원으로서, 전체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 시민 대표가 모이는 협의회, 시민들이 주도하는 배심원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누렸다. ‘데모스(demos)’의 ‘힘(kratos)’이 주도하는 정체 ‘데모크라티아’에서 과거의 혈연관계는 더 이상 힘을 쓰기 어려웠다. 혈연 중심의 ‘부족’은 알맹이 없이 이름만 남았기 때문이다.
도편추방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 제도는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 추방자의 수도 적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도편추방이 이루어진 것은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 뒤의 일이며, 480년부터 65년 동안 13명이 추방을 당했다. 하지만 그런 숫자만으로 도편추방제의 효과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보이는 숫자 이면의 보이지 않는 효과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권력 장악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추방 제도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아니었을까? 도편추방제는 시민의 권력을 탐하지 말라는 침묵의 경고로서 민주정에 기여했던 것이 아닐까?
선동 위험 인물 이름 적어 추방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공허한 이상에 그치거나 도리어 역풍을 맞은 정치 개혁의 사례를 많이 본다. 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 개혁은 성공했고 헤로도토스는 그 효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제 아테나이인들은 강성해졌다. 이세고리아(isegoria)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훌륭함을 보여준다. 아테나이인들도 참주의 지배를 받을 때는 전쟁에서 그들의 이웃 나라 중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 더 나을 게 없었지만, 참주들로부터 벗어나자 단연 선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속 상태에서 주인을 위해 일할 때는 게으름을 피웠지만, 자유를 얻은 뒤에는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과를 이루려 적극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역사’ 5권 78장)
이세고리아는 이소노미아(isonomia)와 더불어 아테나이의 직접 민주정을 대표하는 이념이다. 이소노미아는 동등한 권리, 평등을 뜻한다. 민주정에서 모든 시민은 법 앞에서 평등한 동료였다. 최고 권력자 ‘아르콘’도 첫 번째 시민이었을 뿐이다. 이세고리아는 그런 평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권리, 동등한 발언권을 가리킨다. 당대의 시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권리’가 아니라 정치에 참여해 ‘말할 권리’였던 셈이다. 입법, 사법, 행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결정에 참여해 발언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권리가 없다면 법 앞의 평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테나이의 민주정에서 이세고리아와 이소노미아가 데모크라티아와 동의어처럼 쓰였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기원전 50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확립된 민주정은 젊고 활기찬 정체였다. 이런 활력이 없었다면, 아테나이는 490년과 480년, 두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그리스를 지킨 선봉장 역할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전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피정복민을 포함한 다민족 연합군이었고 ‘예속 상태에서’ 왕을 위해 싸우는 군대였다. 반면 아테나이 군대는 규모가 작아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였다. 헤로도토스의 말대로 민주정은 자신에게 유익한 성과를 위해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싸우게 했다.
‘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상이 없는 현실 적응의 정치는 침팬지 세계에도 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는 그런 ‘침팬지 정치’(F. de Waal)의 수준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한다. 2024년에는 이상과 역량을 갖춘 ‘클레이스테네스들’의 등장을, 그리고 그들을 가려내는 시민의 판단 역량을 기대해 본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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