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증거” 13년 호소…가습기살균제 모든 가해기업 책임 인정

김정수 기자 2024. 1. 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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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이어 SK케미칼·애경 2곳 항소심 유죄
CMIT·MIT, 폐질환과 인과관계 신빙성 판단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의 유죄 선고를 호소하는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문제가 드러난 것도 늦었고, 책임에 대한 단죄도 늦었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서승렬)가 유독물질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참사를 일으킨 기업 임원들에게 11일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모든 가해 기업들의 형사상 책임을 인정했다. 2011년 8월, 참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이후 13년 만이다.

“해당 성분이 폐 질환을 유발하고 악화시키거나 폐까지 도달한 사실을 입증한 시험은 없었다”며 무죄로 봤던 1심과는 달리, 2심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 자체의 유해성과 인체에 미친 악영향이 입증된다고 봤다.

1심 판결 이후 “내 몸이 증거”라는 피해자들의 반발과 ‘재판부가 과학적 증거의 증명력을 판단하는 데 있어 과학계 경험칙이 아닌 일반적 경험칙에 의존했다’는 과학계와 법조계의 비판을 받아들인 셈이다. 특히 국립환경과학원이 지난해 말 가습기 살균제에 들어있는 시엠아이티·엠아이티 성분이 기도를 통해 폐까지 이동하는 것을 확인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등, 1심 이후 가습기 살균제 성분과 폐 질환 사이의 인과 관계를 입증하는 추가 연구 결과들이 잇따라 나온 것이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

2심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전문가들의 연구를 고려하면 시엠아이티·엠아이티가 폐 질환 또는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 간 구체적 인과관계의 신빙성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채경선(맨 왼쪽)씨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들머리에서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 제조 및 판매 혐의로 에스케이(SK)케미칼·애경 등의 전직 대표 등에게 유죄 판결이 나온 뒤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정부가 지금까지 공식 인정한 수만도 무려 5667명(사망자 1258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엄청난 참사를 일으킨 기업들에 대한 단죄는 그로부터 5년이 더 지나서야 시작됐다. 2017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가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인 옥시와 세퓨의 임직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독성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사용했다. 당시 재판부는 흡입독성 실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제품을 만들곤 안전하다고 홍보하며 팔아 73명을 숨지게 한 혐의를 인정해 옥시의 전 대표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의 구형은 징역 20년이었다.

피해자 유족들은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커녕 두세번 죽이는 솜방망이 판결”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징역 7년은 피고들에게 적용된 업무상과실치사죄와 부정광고죄로 선고할 수 있는 최대 형량이었다. 이 제조업체 대표는 항소심에서 1년을 감형받아 복역을 마치고 2022년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날 유죄 판결을 받은 에스케이케미칼과 애경의 경우, 옥시와는 다른 독성 화학물질인 시엠아이티·엠아이티를 원료로 사용했다. 지난해 말까지 정부가 공식 인정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5667명 가운데 41%인 2312명이 이 두 성분이 든 제품을 사용했다. 에스케이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에스케이이노베이션의 전신)이 1994년 처음 제조 판매한 가습기 살균제에는 이 두 성분이 들어 있었다. 피에이치엠지보다 더 먼저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사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유죄 판결이 늦었던 것은 피에이치엠지 원료 제품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발생과의 인과관계 확인이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두 제조사 임직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도 2018년 11월 “이들 성분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과 마찬가지로 폐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환경부 보고서가 나오고서야 본격화됐다.

하지만 이날 2심 재판부는 인과관계 여부와 함께 유공이 1994년 ‘독성 시험을 해야 한다’는 내부 의견을 무시하고 시엠아이티·엠아이티 성분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고 이듬해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어 실험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계속 판매가 이뤄졌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 “이 판결의 결론은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갔더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재판부도 개별 피해를 읽으면서 너무나 감정적으로 힘들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와는 별도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 유족들은 2012년 1월 제조업체들과 참사를 막지 못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에 나섰다. 하지만 중간에 유족과 제조업체 사이에 조정이 성립돼 국가를 상대로만 진행된 이 소송에서 법원은 2015년 1월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에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확인해 그 판매를 중지시킬 의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민사 소송에서 법원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제조업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은 2016년 11월이 돼서야 나왔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제10민사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13명이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제조업체가 피해자들에게 최대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국가의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항소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국가 책임은 2심 법원에서 지금도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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