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훈의 법과 사회] 안전, 민주사회의 핵심 가치
희망차게 시작해야 할 신년 벽두부터 시민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새해를 여는 덕담이나 화두는 가려지고 공포와 두려움이 앞선 출발이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공격이라서 일반 시민의 불안감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뜩이나 지난해 우리를 불안케 한 이상동기 범죄, 일명 묻지마 범죄로 놀란 시민이다. 어디서 흉기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누군가로부터 칼부림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커진 상태다. 전례 없는 팬데믹의 공포에서 벗어나 외부 활동이 많아진 시기라서 더욱 두렵다. 범죄위험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시민을 불안하게 한다. 범죄에 더해서 자연 재난, 산업재해와 대형사고, 이념 대립과 갈등, 허위 정보 유통 등 날로 증가하는 위험 요소로 불안하기만 하다. 그중에서도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는 생생한 범죄 보도로 인해 커져만 간다. 살인, 강도, 성폭력 범죄와 같은 강력범죄뿐만 아니라 마약, 민생을 침해하는 전세 사기, 문자 사기 같은 교묘한 속임수에 누구라도 넘어갈 수 있어 방심할 수 없다. 인간을 뛰어넘을 듯 닮아가는 생성형 AI가 등장하여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딥보이스나 딥페이크처럼 AI를 악용한 범죄 수법도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사실 실재 범죄위험을 나타내는 객관적 통계 수치에 비해 시민의 불안감은 과도하게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처럼 사회의 안전상태와 치안 수준을 나타내는 범죄율이 낮고 치안이 잘되어 있는 국가도 없다. 10만명당 발생 건수로 본 살인율도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 범죄율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살인과 강도 같은 강력범죄는 줄어들고 있지만 대중이 느끼는 범죄율은 정반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독일, 미국 등 세계적으로 강력범죄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대중들은 항상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다고 느낀다. 객관적 안전도는 높더라도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의미의 주관적 안전도는 낮은 게 일반적이기는 하다.
양자 사이의 불비례는 여러 요인 때문이다. 범죄율이 높았을 때의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지는 많은 정보로 범죄 피해가 내 일처럼 와닿으니까 더 불안해진다. 불안감은 범죄가 핵심 원인이지만 다른 사회안전망과도 관련이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사회지표에 따르면 10명 중 3명만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범죄가 불안 요인 3위다. 주거, 일자리, 교육, 질병, 노후 등 여러 가지 불안 요소가 연결고리처럼 작용하여 범죄에 대한 불안감은 실제 범죄 피해보다 높게 나타나기도 한다.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실제 얼마나 안전한가도 중요하지만, 시민이 얼마나 안전하게 느끼며 살아가는지도 중요하다. 객관적 안전과 주관적 안전감 모두를 높이는 게 국가의 중요 임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안전과 평화를 지키는 힘이 곧 국가다. 범죄예방과 치안 같은 객관적 안전도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하지만, 범죄 발생·검거 등 객관적 지표만으로 시민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다. 무엇보다 경찰, 검찰, 법원 등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높여야 한다. 범죄 발생부터 수사와 재판, 형 집행까지 공정하고 신속해야 객관적 범죄율보다 높은 주관적 불안감을 낮출 수 있다.
진보든 보수든 이념을 떠나서 안전은 민주사회의 핵심 가치다. 국정과제에도 여기저기 안전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와 여야 정치인은 시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자기편만이 아니라, 이념을 같이하는 동료 시민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시민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다. 국가 안보에서의 안전이든, 사회안전망에서의 안전이든, 치안에서의 안전이든 안전이 나침반이자 지향점이어야 한다.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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