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의 친구, 모나미 볼펜

기자 2024. 1. 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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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처음 왕만두만 한 핏덩어리로 태어나 이내 젓가락, 연필 그리고 볼펜하고 사귀었습니다. 그중의 모나미 볼펜은 언제나 볼품이 참 건조하고 간단해서 가까이하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수학 시간에 미적분을 맹렬하게 풀 때 기저귀에 애기똥 묻히듯 볼펜똥이 귀엽게 흘러나오기도 했던 나의 친구, 모나미.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는 금쪽같던 쉬는 시간에 티나크래커 한 봉지를 걸고 볼펜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시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코메티 조각의 길쭉한 다리 같은 볼펜은 나름 부품이 정교합니다. 몸통, 앞뚜껑, 볼펜심, 스프링, 똑딱이 걸쇠. 나사는 쉽게 풀리지만 뚜껑 걸쇠를 분리하자면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손끝의 감각이 미세한 녀석이 결국 이겼습니다.

나의 이력과 필기구의 종류는 정확히 일대일 대응의 관계입니다. 초등학교-연필, 중학교-만년필, 고등학교-볼펜, 대학교-볼펜 그리고 사회-볼펜과 붓. 그 묵묵한 것들이 실어나른 각종 서류의 밑줄, 연습장의 낙서, 영수증의 사인들. 어지럽기만 한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주던 글씨와 함께했던 날들이 그립습니다.

어디 여행 가서 침대에 누운 채 떠오른 생각을 수첩에 적다 보면 글씨의 길이 문득 끊기게 됩니다. 볼펜액의 끈적함도 그 어떤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지요. 볼펜, 시쁘게 보여도 그 뭉툭한 끝에 생각을 집중시키고 중력이 허락해야 글자는 온전히 태어납니다.

사람의 일생, 구름의 칠판 아래에서 미지수X 찾아 방황하는 것. 이제 분수처럼 떨어질 나의 꼭지점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럴 때 현관에서 울부짖는 등산화, 그 무슨 생각을 받아적을 태세로 긴장하는 종이 앞의 볼펜을 떠올립니다. 더 이상 발밑에서 그림자가 흘러나오지 않을 때의 말 하나도 준비합니다. 등산화 한 결레와 볼펜 하나 넣어다오!

모나미는 나의 친구인 ‘Mon Ami’를 연음하여 표기한 것입니다. 요란한 필기구들 사이에서 단출한 맵씨의 수행승 같은 나의 도반, 모나미. 신년 첫 기획회의하고 누가 흘린 걸까요. 어디에서든 있는 자리를 장악하는 저 볼펜 한 자루의 사상(思想). 회의실 탁자에 흑백의 볼펜 하나 뒹굴길래 이런 객적은 소리 한마디 적어보았습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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