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힘…영화 '시민덕희'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돈도 없고 백(배경)도 없는' 평범한 여성 넷이 폭력과 자본을 갖춘 거대 범죄 조직에 맞서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박영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시민덕희'는 가능하다고 답한다. 네 명의 여성이 정의감과 양심, 그리고 고통을 함께하는 우정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중년 여성 덕희(라미란 분)가 동생뻘의 여성 셋과 힘을 합쳐 중국에 근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보스를 잡으러 나서는 이야기다.
덕희는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화재를 당해 세탁 공장에 취업한 노동자다. 영화는 긴 서론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덕희가 손 대리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짓말에 넘어가 큰돈을 잃어버린 덕희는 경찰서에 찾아가지만, 박 형사(박병은)는 심드렁하기만 하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해결하기란 극히 어렵다는 박 형사의 말에 덕희의 마음은 새까맣게 탄다.
실의에 빠진 덕희에게 다시 손 대리가 전화를 걸면서 이야기는 반전된다. 손 대리는 중국 칭다오에 근거를 둔 보이스피싱 조직에 납치돼 강제로 범죄에 가담하게 된 한국 청년 재민(공명)이다.
재민은 덕희에게 조직의 정보를 제공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덕희는 칭다오로 건너간다. 세탁 공장 동료인 조선족 출신의 봉림(염혜란)과 숙자(장윤주)가 덕희와 함께하고, 현지에서 봉림의 동생 애림(안은진)도 합류한다.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전복을 시도하는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데서 나온다.
관객은 이들에게 쉽게 감정 이입이 되고, 연약해 보이는 이들이 무시무시한 범죄 조직에 다가갈 때 마음을 졸인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이무생)이 어둠 속에 있다가 후반부에야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서스펜스를 더한다.
평범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현란한 액션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기보다는 이들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거나 임기응변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걸 보여주면서 통쾌함과 웃음을 유발한다.
'시민덕희'는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힘을 믿는다. 정의감과 우정으로 하나가 된 시민들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들의 우정은 궁핍한 생활을 헤쳐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연대에서 나온다.
보이스피싱을 주제로 한 김선·김곡 감독의 영화 '보이스'(2021)와도 대조된다.
'보이스'에서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주인공 서준(변요한)이 전직 형사로 범죄 조직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데다 격투 실력도 뛰어난 히어로에 가깝다는 점에서다. '시민덕희'에선 여성들로만 구성된 그룹이 남성 중심의 범죄 조직에 맞서는 점도 눈에 띈다.
'시민덕희'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경기도 화성의 중년 여성이 2016년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경찰에 제공해 조직 총책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다. 영화에서 덕희가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벌어지는 일은 극적 재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실화를 토대로 했다고 하더라도 경찰도 어떻게 못 하는 범죄 조직을 평범한 사람들이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서민을 등쳐 먹는 보이스피싱 문제를 뿌리 뽑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로 볼 수 있다.
라미란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최악의 궁지에 몰려 어쩔 줄 몰라 하고, 국가가 도와주지 않을 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설 만큼 억척스러우며,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처지에 공감하고 동정할 줄 아는 중년 여성을 사실감 있게 재현해낸다.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이 라미란과 빚어내는 티키타카도 자연스럽다.
'선희와 슬기'(2019) 등 중·단편을 연출해온 박영주 감독에게 '시민덕희'는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박 감독은 11일 시사회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내가 어리석은 탓에 당했다'고 자책하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며 "피해자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려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칭다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현지 로케이션이 아니라 국내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제작진은 꼼꼼한 현장답사와 취재를 거쳐 칭다오의 거리를 재현해냈다고 한다.
24일 개봉. 113분. 15세 관람가.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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