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초현실 걸작, 현실이 되다…도쿄 아자부다이힐스
도쿄의 NEW 랜드마크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시계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의 걸작 ‘기억의 지속’이 현실 세계의 건축물이 됐다. 지난해 11월 24일 일본 도쿄 도심에 문을 연 아자부다이힐스의 이야기다. 건축물이 어떻게 초현실주의 작품과 같냐고? 이 질문의 답은 하나다. “두 발로, 천천히 걸어보시라.”
평지를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분명 지하 3층으로 들어섰는데, 반대편으로 나가면 땅을 밟게 된다. 아자부다이힐스의 파빌리온은 럭셔리 브랜드 숍과 유명 레스토랑들로 채워져 있다. 모든 공간은 걷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마치 물결처럼 오르내린다. 달리의 그림 속 그 시계가 된 것처럼.
아자부다이힐스는 완공되자마자 단숨에 일본 최고층 빌딩이 됐다. 중심 건물인 모리JP타워는 330m 높이다. 오사카의 아베노 하루카스를 30m 차이로 제쳤다. 압도적인 높이와 세상에 없던 설계를 자랑하지만, 결코 이웃 건물들을 기죽이거나 주변 풍경을 방해하지 않는다. 언덕을 깎아 만든 평지 위에 억지로 우겨넣은 볼썽사나운 건축물이 아니어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의 건축에는 35년이 걸렸다. 원래 존재했던 것 같은 공간을 목표로 했다. 언덕 지형을 최대한 살려 기존 이 동네가 갖고 있던 풍경을 해치지 않는 대신 건물의 외벽은 꼭 백자의 그것과 같은 곡선미를 살렸다. 세계 주요 도시가 여전히 마천루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아자부다이힐스는 ‘숫자’가 아니라 ‘조화’에 더 방점을 찍은 셈이다. 높이를 뽐내기보다 도시 전체의 균형을 고려해 마치 해 질 녘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는 동네 뒷산을 떠올리게 한다.
아자부다이힐스는 도심 속 작은 도시이기도 하다. 3개의 초고층 건물과 1400가구의 아파트 단지, 여의도 파크원타워보다 큰 오피스 빌딩, 하남 스타필드와 맞먹는 상업시설로 구성됐다.
세상에 없던 설계도로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던 것 같은 공간’을 창조한다는 이 모순된 도전을 완수한 사람은 영국의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다. 팽이를 닮은 스펀 체어와 런던 2층 버스, 미국 뉴욕의 인공섬 ‘리틀 아일랜드’와 ‘베슬’ 등을 설계한 인물.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칭답게 그는 이번에도 허를 찌르는 발상으로 도쿄의 랜드마크를 완성했다. 헤더윅은 아자부다이힐스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말한다. 자신이 설계한 건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인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것이 상호 작용하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34년 걸려 만들었다…'콘크리트 유토피아' 아닌 도시樂 천국
일상의 모든 것 담은 '콤팩트 시티'
도쿄 아자부와 롯폰기, 도라노몬은 일본 최고의 금싸라기 땅을 다투는 지역이다. 이 황금의 삼각지대는 오랜 시간 단절돼 있었다. 세 지역 사이의 연결 고리인 아자부다이가 마치 엉겨 붙은 핏덩이처럼 가로막고 있어서다. 아자부다이는 부촌과 판자촌이 공존했던 서울의 옛 성북동 같은 동네다. 한쪽에는 러시아대사관, 일본 외무성 이쿠라공관, 도쿄아메리칸클럽 등 외교와 사교의 공간이 몰려 있는 반면 반대편엔 낡은 목조 주택촌이 있었다. 소방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 가파른 언덕 구석구석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지역의 흐름이 막혀있던 이유였다.
도시 재생이냐, 재개발이냐를 놓고 일본은 오래 고심했다. 수명이 다한 도시의 모습을 가능한 한 보존하자는 의견과 완전히 허물고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아자부다이힐스는 아자부다이에 ‘재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도쿄 한복판 ‘텐 미닛 시티’ 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른 저출산과 고령화를 경험한 나라다. 인구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도시 재생에서의 키워드도 고령화다. 올해 1억2500만 명의 일본인 중 절반이 50세를 넘는다. 2040년이면 일본인 7명 중 1명은 80세 이상의 노인이 되는 상황. 일본에서 가장 젊은 도시인 도쿄도 2050년이면 3명 중 1명이 65세 고령자가 된다.
이런 구조를 고려해 아자부다이힐스가 제안한 모델이 ‘콤팩트 시티’다. 도시 기능을 한데 모아 ‘걸어서 10분 거리’에서 일하고, 배우고, 쉬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게 가능한 도시를 그려냈다. 이런 기능이 한데 모여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또 다른 집약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는 발상이다.
아자부다이힐스는 입체적인 ‘버티컬 가든 시티’이기도 하다. 도심 기능을 꽉 채웠다고 해서 콘크리트로 둘러친 빌딩숲이 아니란 얘기다. 전체 부지 면적의 37%(2만4000㎡)가 녹지다. 부지 면적은 롯폰기힐스보다 30% 작지만 녹지는 롯폰기힐스의 녹지(1만9000㎡)보다 더 넓다. 그 안에 320가지의 나무를 심고, 과수원도 꾸몄다.
34년이나 걸린 이유
아자부다이힐스의 총 개발 기간은 34년이었다. 개발 프로젝트 대부분을 300여 명에 달하는 소유자의 동의를 받는 데 썼다. 2층짜리 주택 300가구를 지으면 건폐율 50%의 평범한 주택가가 되지만, 같은 입지에 50층짜리 초고층 건물을 올리면 이를 3%로 줄여 나머지를 녹지 공간과 다른 도시 기능들-학교와 병원, 호텔 등으로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아자부다이힐스는 낮에 2만 명이 근무하고, 밤에도 3500명이 거주하는 명실상부한 하나의 도시가 됐다. 서울광장 6개분의 땅과 여의도 파크원타워(연면적 62만7411㎡)보다 37% 너른 연면적에 동대문역 부근 신당10구역만한 아파트 단지를 품고, 청담동 규모(인구 2만4629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도쿄 안의 ‘미래 도쿄’를 짓는데 6400억엔(약 5조8400억원)이 들었다.
롯폰기보다 작은 땅에 ‘미래 도쿄’를
아자부다이힐스의 부지는 8만1000㎡로 롯폰기힐스(11만6000㎡)의 70% 수준이다. 하지만 54~64층짜리 초고층 빌딩 세 동을 올림으로써 연면적 86만1700㎡ 규모의 도시가 됐다. 롯폰기힐스의 연면적(75만9100㎡)을 앞선다.
이 공간에 21만4500㎡의 오피스, 2만3000㎡의 쇼핑몰, 에르메스 까르띠에 불가리 등 명품 업체 10곳과 150개의 점포가 차차 들어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웬만한 아파트 단지와 맞먹는 1400가구의 주거 공간과 122실 규모의 최고급 호텔, 종합병원이 자리 잡았다.
도심 최대 규모의 국제학교도 있다. 세계에서 대사관이 두 번째로 많고, 일본에서 기업 본사가 가장 많은 지역이지만 규모 있는 국제학교가 없다는 점을 반영했다. 지하에는 미술관과 전시장을 배치했다.
아자부다이힐스를 개발한 모리빌딩은 연간 3000만명이 이 도시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아자부다이힐스 개장으로 아자부와 롯폰기, 도라노몬의 혈맥은 시원하게 뚫렸다. 사통팔달 아자부다이를 누구보다 반기는 이들은 원래 이곳에 살던 주민이다.
일본 시가지재개발법은 기존 주민들이 새로 개발한 지역의 주택을 예전에 살던 주택과 1 대 1로 교환하도록 제도화(등가교환제)했다.
모리빌딩 관계자는 “아자부다이에 살던 기존 주민 대부분이 등가교환 제도에 따라 아자부다이힐스의 주거공간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요물 ! 넘실넘실 언덕 위의 마천루…수만명씩 몰리는 핫플로
도쿄 스카이라인 바꾼 '모리JP타워'
일본 최초의 초고층 빌딩은 1968년 도쿄 지요다구에 들어선 가스미가세키빌딩이다. 높이 147m인 이 건물 이전까지 일본에는 100m가 넘는 건물이 없었다. 147m는 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와 같은 높이다. 고대 이집트인이 기원전 2500년 147m의 구조물을 지을 때 일본인은 4500여 년 뒤에야 같은 높이의 건물을 올린 셈이다.
1958년 당시 세계 최고층 구조물이던 도쿄타워(333m)를 세운 일본의 기술력이 부족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매년 2000여 회의 지진이 발생하는 일본에서 마천루는 언감생심이라는 게 건설업계의 통설이었다. 이 때문에 세계 3대 경제대국 일본의 수도에는 네모반듯한 빌딩들만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변화가 시작된 건 2002년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도심 주요 지역의 고도 제한을 없애고 용적률을 두 배로 올리는 등 규제를 풀었다. 1989년 약 50곳이던 도쿄의 100m 이상 초고층 빌딩은 2018년 500곳을 넘었다.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새로 그린 부동산 개발회사가 모리빌딩컴퍼니다. 롯폰기힐스(2003년), 도라노몬힐스(2023년)에 이어 아자부다이힐스까지 200~300m대 초고층 빌딩을 속속 개발하고 있다. 아자부다이힐스의 중심 건물인 모리JP타워는 330m로 일본 최고층 빌딩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자부다이(麻布台)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었다. 언덕을 재개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깎아서 평지로 만든 뒤 건물을 올리는 것이다. 아자부다이힐스는 언덕의 고저 차를 살려 원형을 가능한 한 보존하기로 했다. 다구치 요시후미 모리빌딩그룹 설계부장은 “평면적인 건물을 만들면 그 지역에 어느날 갑자기 ‘쿵’하고 새로운 건물군이 들이닥치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3개의 초고층 타워는 미국 펠리클라크&파트너스(PC&P)가 설계했다. 네모난 건물이 대부분인 도쿄에서 모서리가 유려한 곡선인 모리빌딩의 초고층 빌딩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자부다이힐스는 모리빌딩이 지금까지 건설한 초고층 빌딩들과 또 다르다. 아랫부분이 잘록하고 가운데는 도톰하다가 점점 갸름해지는 도자기를 닮았다.
이 건축물은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 내진설계 기술을 집약한 것이기도 하다. 내진 설계는 펠리클라크가 아니라 일본 기업이 맡았다. 다구치 부장은 “개성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건축설계회사와 안전성을 중시하는 내진설계회사의 갈등을 조율하는 게 개발회사의 주 업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초고층빌딩이 들어선 고지대와 상업시설이 모인 저지대의 고저 차를 살리는 데는 곡선의 파빌리온이 채택됐다. 흘러내리는 듯한 파빌리온은 파고라에서 힌트를 얻었다. 파고라는 정원의 덩굴 식물이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서양식 정자나 차양. 파빌리온 덕분에 아자부다이힐스의 쇼핑몰은 상업시설이면서 녹지 공간을 겸하는 작품이 됐다.
파빌리온에선 가로수를 천천히 감상해보는 것도 좋다. 상록수와 낙엽수 등 10종류를 섞어 심어 사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나트막한 야산을 산보하는 느낌이 들도록 꾸몄다.
언덕의 원형을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동이 어렵지 않은 언덕’을 실현한 아이디어는 영국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낸 ‘지상과 지하의 분리’였다. 지상은 경사를 완만하게 살려 걷기 좋은 산책로로, 지하는 평지를 세 개 층으로 나눈 뒤 에스컬레이터로 연결했다.
日 유명 카페·레스토랑 둥지…33층 전망대는 인증샷 명소
아자부다이힐스를 가야 하는 이유
오모테산도힐스, 긴자 식스, 롯폰기힐스…. 지난 수십 년간 도쿄를 세계 ‘도시재생의 롤모델’로 만든 화제의 장소들이다. 예술과 미식, 럭셔리 등 문화·상업시설이 어떻게 버려진 지역을 되살릴 수 있는지를 증명한 사례다. 이런 실험을 주도하고 성공시킨 회사는 모리빌딩컴퍼니. 아자부다이힐스는 모리가 34년간 공들인 역작이자 그동안의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었다는 점에서 개장 전부터 화제가 됐다.
롯폰기 모리타워의 모리미술관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리는 아자부다이힐스에도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곳곳에 설치했다. 모리JP타워 로비를 장식한 은빛 대형 설치 작품은 덴마크 예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손길이 닿았다. 그의 작품은 쇼핑센터의 반대편 아자부다이힐스갤러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센트럴스퀘어에선 나라 요시토모의 ‘Miss Forest in Tokyo’와 현대예술가 유타카 소네의 작품 등을 마주할 수 있다.
몰입형 아트의 선두주자 격인 ‘팀랩 보더리스’는 도쿄 외곽 오다이바 팔레트타운 전시장에서 아자부다이힐스로 장소를 옮긴다. 오다이바에서 230만 명의 관람객을 모으며 ‘예약 전쟁’을 벌인 팀랩 전시장이 2월 9일 아자부다이로 옮겨온다는 소식에 마니아들은 벌써 기대에 부풀어 있다. 도쿄타워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아자부다이힐스의 33층 무료 전망대와 함께 ‘인증샷 명소’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올봄에는 뉴욕 기반 대형 갤러리인 페이스가 아자부다이힐스에 문을 연다고.
미식도 빠질 수 없다. 일본 전역에 있는 유명 레스토랑과 카페, 디저트 브랜드 역시 아자부다이힐스에 둥지를 틀었다. 미쉐린 스타 셰프인 가와테 히로야스의 프렌치 레스토랑 플로릴레주, 아라비카 커피와 과일 케이크로 유명한 하브스, 교토의 녹차 카페 나카무라 도키치 등이 이미 문전성시다. 만화 <원피스>의 원화와 판화를 보유하고 있는 슈에이샤 만화갤러리, 조각과 현대미술을 음식과 결합한 갤러리 레스토랑인 부타이우라 등 여러 장르가 결합한 흥미로운 공간도 곧 만날 수 있다.
시끌벅적한 공간을 벗어나 조용한 사색 공간을 찾는다면 오가키서점을 찾아가보자. 1942년 교토에서 시작된 이 서점은 ‘읽는 공간의 본질’을 잘 살려 ‘간사이지방의 쓰타야’라고도 불린다. 아자부다이힐스점은 이 서점의 첫 간토지역 진출지. 인테리어를 과감한 블랙으로 꾸며 전통과 모던의 접점을 찾은 오가키는 1인용 독서공간과 문고판 책들을 잘 정리해놓고, 일본의 전통 직물 전시 등을 결합해 ‘의외의 발견’을 하고 싶은 이들의 발길을 오래 붙잡는다.
도쿄=정영효 특파원/김보라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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