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된 ‘82년생 김지영’이 묻는다…주부연금은요?
가사 가치 491조…“연금에 출산·양육·돌봄 크레딧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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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축전기(콘덴서)를 만드는 회사에서 5년 동안 현장직 노동자로 일하던 정아무개(56)씨는 아들을 낳은 뒤 퇴사해야 했다.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하면서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가사 노동과 자녀 돌봄을 맡으며 전업주부로 살았던 정씨는 자녀가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201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일자리를 구할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경력이 끊긴 정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문화 강사, 어린이 통학버스 안전 도우미, 선거 사무원 등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였다. 정씨가 받은 월급은 보통 80만원 선이었다.
요즘엔 이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구직사이트를 뒤져봐도 50대인 정씨가 구할 수 있는 일은 요양보호사나 식당 보조 정도다. 30년 동안 가족 돌봄을 최우선으로 살았지만, 모아둔 자산도 변변한 연금도 없어 정씨는 한숨이 나온다. 그는 “아들은 20대가 됐고, 5년 동안 아팠던 남편도 건강을 되찾아 가사·돌봄 노동에 짓눌렸던 긴 터널을 지났는데, 모아둔 돈이 없어서 노후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여성이 내몰리는 가사노동 가치는 490조9천억원(2019년 기준, 통계청)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5.5%를 차지한다. 그러나 가사·돌봄 노동은 ‘공짜’ 노동으로 취급받는 등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배우자가 국민연금 가입자인 전업주부는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에서 제외돼, 남편과 이혼하거나 별거하게 되면 노후보장 사각지대에 빠진다.
실제 국민연금 직장가입자의 납부월수도 남녀 차이가 크다. 돌봄·육아 등 탓에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은 평균 118개월(2020년 6월 기준, 국민연금연구원) 동안 국민연금을 납부했는데, 최소 가입 기간인 120개월에 못 미친다. 남성의 평균 납부월수는 163개월이다.
이는 노년 빈곤율 차이로도 이어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2022년 빈곤통계연보’를 보면, 여성 노인(65살 이상) 빈곤율은 62.2%(이하 2020년 중위소득 50% 기준)로, 남성 노인 빈곤율(54.3%)보다 높다.
이에 가사·돌봄과 같은 재생산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연금을 지급해 사회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가사노동을 하는 주부들의 조합인 ‘주부유니온’과 전국여성연대, 진보당 경기도당 여성엄마당은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른바 ‘82년생 김지영 연금’(주부연금) 신설을 제안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전업주부의 재생산 노동을 인정하는 크레딧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대표적인 제안이 출산·양육·돌봄 크레딧이다. 크레딧 제도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인정해 주는 것을 뜻한다. 현재는 출산·군 복무·실업 크레딧이 시행 중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200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출산 크레딧은 자녀 둘 이상을 낳거나 입양할 경우 최대 50개월까지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추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가 1명이거나 없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아 자녀 수와 상관없이 출산·양육 크레딧을 확대 시행하고, 장애·질병 등을 겪는 가족을 돌보느라 경제활동을 못 하는 경우에 돌봄 기간만큼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인정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호선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들의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남성보다 짧은 현실을 고려했을 때, 가입 인정 소득 수준을 낮추는 한이 있어도 가입 기간을 늘려 연장 수급권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선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은영 주부유니온 대표는 “국민연금 제도는 전 국민의 노후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저출산(저출생) 해소’가 아니라 가사·돌봄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크레딧 제도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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