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독성시험"…'가습기살균제' SK케미칼·애경 전 대표 2심 유죄(종합)
"형량 너무 적어 솜방망이도 안된다"…피해자 눈물
(서울=뉴스1) 이세현 기자 = 인체에 유해한 원료물질을 사용해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대표에게 2심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서승렬 안승훈 최문수)는 11일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을 깨고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SK케미칼·애경산업 관계자들에게도 적게는 금고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 많게는 금고 4년이 선고됐다.
◇ "1994년 제기된 살균제 위험성…2000년대엔 왜 없었나"
재판부는 "메틸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치아졸리논(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 '유공 가습기메이트'가 국내 최초"라며 "당시 유공은 제품 출시에 앞서 유공 생물공학연구실에 살균력과 안전성을 충족시키는 적정농도 등의 실험을 의뢰했고 '독성 시험을 수행해 안전성 담보 데이터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에 당시 유공은 출시 한 달 전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마우스를 이용한 가습기메이트 간이 흡입노출시험'을 의뢰하고도 결과를 받기 전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유공이 제품 출시 이후인 1995년 7월 받은 서울대의 실험 결과에는 백혈구 수치 감소 등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 실험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유공은 판매중지나 회수조치를 하지 않은 채 판매를 계속했고 SK케미칼과 애경산업 등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재판부는 "유공 생물공학연구실이 1994년 제기한 의문은 2002년, 2006년 출시된 애경 및 이마트 가습기살균제 판매 과정에서도 당연히 제기됐어야 하는 질문"이라며 "피고인들이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거나 회피하고 어떠한 안전성 검사도 하지 않은 채 살균제 제품을 판매한 것은 제조·판매업자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한 업무상과실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 "전국민 상대 독성시험…동물실험보다 유력한 증거"
앞서 1심 재판부는 "옥시 등 관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가습기살균제 원료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과 CMIT·MIT 등과는 성분에 많은 차이가 있다"며 "추후 추가 연구 결과가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증거로는 CMIT·MIT 살균제 사용과 피해자들의 사망·상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홍 전 대표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1심 판단을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제품 출시 전 동물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유통됐다"며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환경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고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정의했다.
재판부는 "애경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를 단독 사용한 피해자들도 조직병리, 영상, 임상 소견이 PHMG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폐질환 또는 천식 피해 판정이 내려졌다"며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갖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조직병리, 영상, 임상 판정의들이 PHMG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과 동일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판정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는 실험실 환경에서 동물을 상대로 한 제한된 실험 결과보다 일반적 인과관계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고 재판부는 봤다"고 강조했다.
2심 재판부는 1심이 무죄의 근거로 인용한 실험들은 PHMG와 CMIT·MIT의 물리화학적 특성 및 독성기전의 차이, 사람과 쥐간 종간 차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평가여서 그 결과를 가지고 CMIT·MIT 살균제와 폐질환·천식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재판부 "무겁게 판단했다"…피해자들 "솜방망이도 못돼"
재판부는 이날 "이 사건을 선고하기 직전까지 사건의 법리부터 양형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각각의 피해자와 피고인이 주장하는 개별 사정에 고민했다"며 "재판부의 결론에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주의의무 위반 과실은 재판부가 굉장히 무겁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선고 후 피해자 측은 눈물을 흘리거나 "왜 살인죄 판단을 하지 않았으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감정이 격해진 모습을 보였다.
안 전 대표는 "피해자에게 할 말이 있나" "상고할 것인가" 등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법원을 떠났다.
피해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1심 무죄와 달리 2심에서 유죄가 선고돼 다행이지만 형량이 매우 아쉽다"며 "검찰의 구형량인 금고 5년은 피해자의 규모와 심각함을 볼 때 솜방이인데 그 형량에도 못 미쳤다"고 입장을 밝혔다.
홍 전 대표 등은 CMIT와 MIT로 가습기살균제를 개발·제조·판매하는 과정에서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인명 피해를 낸 혐의로 기소됐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이마트가 2002~2011년 제조·판매한 '가습기메이트'는 옥시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다음으로 많은 피해자를 낸 제품이다.
검찰은 1994년 가습기살균제를 개발할 당시 서울대 흡입독성 시험보고서 등 자료를 입수해 안전성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홍 전 대표 등을 재판에 넘겼다.
앞서 1심은 "CMIT·MIT 살균제 사용과 폐질환 발생 혹은 악화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홍 전 대표 등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s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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