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SK·애경 前대표 2심서 유죄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 등이 항소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SK‧애경의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점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본 1심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서승렬)는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회사 관계자들에게도 모두 금고형이나 금고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다만 재판부는 홍 전 대표 등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다며 법정구속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SK‧애경의 가습기 살균제는 출시 전 동물들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연령대의 불특정 다수 국민에게 유통됐다”며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여러 다양한 환경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 독성 시험이 행해진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피고인들은 제품 출시 전 수행하도록 요구되는 안전성 검사를 수행하였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품 출시 후 요구되는 관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그 피해를 확대시켰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폐 질환 또는 천식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며 “피고인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홍 전 대표 등은 2002~2011년 인체 유해 물질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첨가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의 쟁점은 CMIT·MIT가 인체에 유해한 물질인지, 이들 성분을 담은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것이 업체에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위반한 업무상 과실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2021년 1월 1심은 CMIT·MIT가 폐 질환과 천식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은 업무상 과실 등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않은 채,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이에 불복해 항소한 검찰은 CMIT·MIT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입증한 국립환경과학원 연구보고서 등을 새로운 증거로 제출했다.
2심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을 뒤집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CMIT·MIT 성분과 폐 질환, 천식과의 일반적 인과관계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연구들이 존재한다”면서 2011~2022년 사이 실시된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2심 재판부는 홍 전 대표 등에게 업무상 과실이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가 최초로 출시된 1994년 당시 유공(현 SK케미칼)은 안전성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이를 무시한 채 가습기 살균제를 상품화했다”며 “이는 후속 제품의 판매에 관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당연히 제기되었어야 하는 질문이지만, 피고인들은 어떠한 안전성 검사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항소심을 심리한 서승렬 부장판사는 주문을 마친 후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기까지 깊은 고민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서 부장판사는 “오늘 선고 직전까지도 이 사건 법리부터 양형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면서 “재판부가 내린 결론에 대해 불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제조‧판매업자에게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위반한 과실을 굉장히 무겁게 봤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들은 선고 후 “1심과 달리 2심에서 유죄가 선고돼 다행이지만, 형량은 매우 아쉽다”며 “대법원 확정 판결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보상도 제대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같은 혐의로 2016년 기소됐던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 등 업체 주요 관계자들은 2018년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이 업체들은 SK‧애경과 다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HG) 성분을 사용했는데,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과 피해의 인과관계가 빨리 인정돼 수사‧재판이 먼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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