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고기 대접하니 손님 늘었어요”
[서울&] [사람&]
고기 아끼는 손님 모습에 가슴 짠해져
지난 12월 어르신 24명 초대 고기 대접
“앞으로 매달 한 번 고기 식사 대접하며
좋은 삼겹살집 할아버지로 늙어가고파”
“지난해 6월께 40대 아버지와 초등학생 아들이 가게에 저녁 식사하러 왔어요. 밥은 없이 고기 2인분을 주문했는데 아버지는 안 먹기에 입에 안 맞나 싶었죠. 그런데 고기가 세 점 정도 남았을까. 아버지가 그걸 잘게 잘라서 소주 한잔 마시더라고요.”
김범선(43)씨는 강서구 화곡8동에서 제주 돼지고기 전문점 ‘범식당 까치산점’을 운영한다. 프랜차이즈점은 아니고, ‘범식당’이라는 이름이 많아 구분하기 위해 ‘까치산점’을 붙였는데 범식당으로 통한다. 김씨는 4일 “나도 어린 시절 여유롭게 자라지 못해 어쩌다 아버지께서 고기를 사주시면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손님도 금전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서 마음이 짠해졌다”고 했다.
김씨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에 매달 5만~20만원씩 꾸준히 기부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한동안 기부하지 못했다. 그런 김씨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저녁 식사’는 다시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됐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5일 지역에 사는 65살 이상 취약계층 주민 24명을 가게로 초대해 고기와 함께 음식을 대접했다. “동 주민센터에 얘기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 지원해줬어요. 고기를 납품받는 거래 회사에서는 고기를 무료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김씨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서 더욱 힘이 났다”고 했다. “남은 고기는 싸드렸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무척 뿌듯했죠.” 김씨는 “이달에도 날짜를 조율하고 있고 앞으로 매달 한 번씩 고기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디자인을 전공한 뒤 출판사 편집팀에서 사회 첫발을 디뎠다. 하지만 김씨는 꼭 해보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요식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내 가게를 차려서 대표가 되는 게 꿈이었죠.” 김씨는 2009년부터 회사를 마치면 저녁에 선배 가게에서 주방 일을 하며 요식업을 배웠다. 그러다 초밥 가게, 피자 가게 등에서 점장으로 근무했다.
김씨는 2015년 초 강남에 있는 제주 돼지고기 전문점에서 일하다 2016년 꿈꿔왔던 자신의 가게 범식당을 열었다. 하지만 2019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유행하고, 2020년 코로나19가 닥쳐 어려움을 겪었다. “4~5명이 함께 하던 가게가 인건비 등으로 힘들어졌어요.” 김씨는 “가게를 접을까 고민도 했지만 친구와 의기투합해 시작했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2020년 8월부터 지금까지 정신과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습니다.” 김씨는 “꾸준히 병원에 다니면서 상담 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김씨는 고민 끝에 2020년 9월부터 식당 근처에 배달 전문 피자점을 열었다. “직원들 월급 주려고 생각해낸 고육지책이었죠.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버티기로 한 거죠. 장사가 꽤 잘됐어요. 배달 업종은 오히려 성수기였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가게 두 개를 운영하면서, 코로나19 때도 월급을 25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올려줬습니다.” 김씨는 “피자 가게에서 얻은 이익으로 식당 손해를 메우며 코로나19를 헤쳐왔다”며 “지금 생각해도 너무 다행스럽다”고 했다. 이에 더해 개업을 앞둔 고기 식당 컨설팅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씨는 “식당 메뉴 준비와 가게 브랜드 작업도 몇 곳 해줬다”며 “그동안 고기 식당을 운영해온 경험을 살릴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범식당은 목살 2인분과 오겹살 1인분을 합친 근고기 600g에 4만9천원, 목살이나 오겹살은 200g에 1만7천원이다. “프리미엄 1등급으로 제일 좋은 고기만 선별해서 받습니다. 서울 시내 제주 돼지고깃집 중에서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팝니다.” 김씨는 “다른 곳은 보통 근고기 600g에 5만4천~5만8천원 정도 받는다”며 “거기 비하면 우리는 5천~9천원 정도 싸다”고 했다.
“저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기를 구워줍니다. 손님은 드시기만 하면 되죠. 고기가 타면 가게 실수를 인정하고 바꿔줍니다.” 김씨는 “가게에서 고기를 모두 구워주다보니 고기가 타고 있어도 뒤집지 않는 손님이 많다”며 웃었다. “봉사활동 하고 난 뒤로 손님이 많아졌어요. 기분 좋고 고마운 일이죠.” 범식당은 화곡동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맛집으로 소문났다. “주말에는 예약을 받지 않습니다. 1시간30분 정도 대기해야 자리가 납니다.” 김씨는 “동네 어르신들도 단골이 돼 많이 온다”고 했다.
김씨가 범식당을 시작한 지도 햇수로 벌써 8년째다. “갓난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고등학생이 군대 갔다 오는 세월이라고 말하면 재밌어해요.” 김씨는 “동네 손님들 보면 세월이 간다는 걸 느낀다”며 “그럴 때마다 이게 사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기회가 닿으면 국밥이나 해장국집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김씨는 “지금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서민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괜찮은 국밥집도 해보고 싶다”며 “이 건물에서 쫓겨나지만 않으면 삼겹살집 할아버지로 천천히 늙어가고 싶다”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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