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충 대신 충돌만 남았다”… 한반도 화약고 만든 北 의도는 [박수찬의 軍]
3일간 340여발. 북한이 지난 5일부터 사흘간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퍼부은 포탄 숫자다.
한미일 안보협력에 따른 고강도 압박에 직면한 북한이 새롭게 제시하는 전략과 그에 따른 결과는 우리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던 9.19 남북군사합의가 무력화되는 것을 넘어서서, 한반도가 상시적인 충돌과 갈등의 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위기관리용 ‘출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아랍 관계처럼 바뀔 가능성
한국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는 지난 8~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군수공장 현지지도에서다.
김 위원장은 한국을 ‘주적’으로 규정하면서 “우리 국가를 상대로 무력 사용을 기도하려 들거나 우리의 주권과 안전을 위협하려 든다면, 모든 수단과 역량을 총동원해 대한민국을 완전히 초토화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면서 자위적 국방력과 핵전쟁 억제력 강화를 강조했다.
한국을 협상 파트너 또는 공존할 동포로 보지 않고, 타도 대상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동포로서 통일을 꿈꾸면서도 공멸을 초래할 대규모 전면전 위험이 있던 냉전 시절의 특수관계는 사라진다.
도발과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역내 긴장이 지속되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가 관계와 비슷해진다.
핵무기를 개발한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 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레바논 내 무장정파 헤즈볼라에 대한 공습을 감행해왔다. 이란과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도 이스라엘과 여러 차례 충돌하며 갈등을 빚었다.
북한이 이스라엘-아랍 관계와 유사하게 한반도 정세를 몰고 가면서 남북 관계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면, 한반도는 상시적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핵은 북한의 행동을 더욱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비핵보유국보다 재래식 도발이나 무력충돌을 더 쉽게 결심한다. ‘핵보유국과 전쟁할 나라는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는 국지적 분쟁의 규모와 횟수를 키운다. 핵무기로 전면전 위협은 감소하지만, 재래식 국지 분쟁은 늘어나는 ‘안정 불안정 역설’이 발생한다.
2010년대부터 이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무력충돌, 인도와 파키스탄의 충돌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동포’ 개념도 없애면서 정치적·심리적 장벽을 없앤 북한으로선 더 이상 거칠 게 없다.
언제든 선제적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불확실성을 증폭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김 위원장이 무력사용 조건으로 언급한 ‘주권과 안전의 위협’은 그 범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모호한 개념이다.
얼핏 무력을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핵전쟁이든 재래식 전쟁이든 관계 없이 사실상 마음대로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북한의 위협을 단순한 허세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1950년에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감행,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경험이 있는 북한이다. 2010년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유사시 확전의 여부를 북한이 정할 수 있는 여지를 키우고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을 수만 있다면, 북한은 무력을 비롯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김 위원장은 올해 초 화성-18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차량과 신형 전술유도무기 화성-11라형 발사차량 공장을 현지지도했다.
김 위원장은 제1선 대연합부대와 미사일부대에 대한 신형 장비 배치계획을 집행하는데 만족을 표시하면서 생산능력 확장을 주문했다.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국 전역을 평정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까지 감안하면, 북한의 의도가 상당 부분 드러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정규군을 보유한 국가는 억제력과 전쟁수행능력으로 구성된 군사력을 건설한다.
억제력은 개전 시 큰 피해가 있다고 적을 위협해 전쟁을 막는다. 전쟁수행능력은 전쟁에서 피해를 줄이거나 최소 희생으로 제한적 또는 완전한 승리를 하는데 필요한 요소다.
핵무기와 ICBM을 확보한 국가는 전술핵 개발로 옮겨가거나 재래식 전력증강에 나선다. 두 가지 모두 전쟁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무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 통해 실전능력을 한층 높일 수 있다.
북한에 억제력은 전략핵무기와 ICBM이다. 단거리 미사일과 전술핵, 재래식 전력은 전쟁수행능력이다. 미국을 겨냥한 화성-18형 ICBM과 핵탄두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
관건은 전쟁수행능력이다. 전쟁을 치르려면 군대에 무기를 제때 공급해야 한다. 이는 무기의 대량생산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다.
북한의 이같은 행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김정은 체제와 세습 체제의 존속일 가능성이 크다.
북핵과 한미의 확장억제, 남북한 재래식 전력이 대치하는 공포의 균형 국면에서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국 관계로 전환하는데 성공하면, 통일 논의는 어려워진다. 김정은 체제는 한층 굳건해진다.
‘공포의 균형 위에 새로운 남북관계 틀을 만들자.’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와 비난 속에서도 핵능력을 키우고 도발적 행동을 거듭했던 것은 이 카드를 꺼내들기 위한 행보였다.
북한의 이러한 행동을 저지하면서 기존의 남북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있을까. 한미일 안보협력과 확장억제 강화를 통해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고, 한국군 전력증강을 지속하면 북한의 행동을 견제하고 저지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 적절한 출구전략을 제시하지 않으면, 북한이 강압적 행동을 실천에 옮길 위험이 있다.
부글부글 끓는 압력밥솥의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억지로 뚜껑을 누르기만 하면 터지기 쉽다. 제때 김을 빼야 밥솥이 터지지 않는다.
북한의 대남 위협에 맞서 대북 압박을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이자 의무다. 다만 선제공격 의도를 공공연히 내비치는 북한과 강대강 대치 국면을 지속하기만 하면, 한반도 정세가 뜻하지 않게 악화될 위험도 있다.
고강도 압박과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에 출구전략을 제시할 준비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반도는 서로를 적대하며 수시로 무력분쟁이 발생하는 두 개의 국가 체제가 굳어질 수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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