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아리랑’ 가락 타고 기차 여행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정선아리랑열차를 타고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이 고장의 멋과 맛이 한 해를 헤쳐 나갈 힘을 주었다.
겨울에 떠나는 여행은 으레 그렇다. 여장을 꾸려 밖으로 나서면 푸르스름한 새벽하늘과 마주한다. 몇 걸음 안 가서 뺨이 차가워지고, 폐부 깊숙이 서늘한 공기가 들어와 정신이 맑아진다. 상쾌한 기분으로 발을 떼는 중 적연히 떠오른 해가 세상에 온기를 퍼트린다. 계절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침, 호젓한 거리를 지나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겨울을 맞이하는 강원도 하고도 정선이다.
정선의 마음, 아리랑시장
서울에 위치한 기차역 중 청량리역으로 향한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이곳에서만 출발하는 특별한 열차에 탑승하기 위해서다. 마침 주인공인 정선아리랑열차가 승강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매주 주말과 정선오일장이 서는 날에만 운행하니 정정선아리랑열차 매주 주말과 정선오일장이 서는 날에만 운행하는 특별한 열차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정선 아우라지역까지 간다. 선으로 가는 특별한 방법이라 할 만하다. 열차에 올라타자 한국 전통 무늬로 알록달록하게 꾸민 객실이 승객을 반긴다. 화려한 디자인을 구경하며 감탄한 후에는 차창에 시선을 둔다. 일반 열차보다 면적이 넓고 천장 바로 아래 창을 달아 객실 전체가 한층 환하다.
드디어 강원도로 떠날 시간. 열차는 청량리역을 나서 정선 아우라지역까지 네 시간가량을 천천히 달린다. 의자가 창을 바라보도록 방향을 틀어 놓은 좌석에 앉아 밖을 보고 있으니 꼭 영화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승객들은 정선군 관광가이드가 풀어 놓는 이야기보따리에 귀 기울이고, 흐르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정선역과 가까워진다. 이른 아침에 떠나왔으니 시간이 슬슬 정오를 가리킨다. 따사로운 햇살로 땅 위에 온기가 감돌 즈음 열차가 정선역에 승객을 하나둘 내려놓는다. 삼대가 모처럼 함께 온 여행이라며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가족, 배낭 하나씩 메고 가리왕산으로 당차게 향하는 일행, 경기도 파주에서부터 단둘이 떠나온 모녀…. 이들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무리 지어 가는 사람들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정선아리랑시장에 도착한다. 조선 시대 정선읍내장에서 비롯한 아리랑시장은 1966년 지금의 이름과 구색을 갖췄다. 태백산맥 허리께에 자리한 산간 지방이라 이웃끼리도 교류가 쉽지 않았던 탓에 각종 물건과 사람이 모이는 장날은 정선 사람에게 소중하고도 즐거운 날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이 흘러 교통과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 이제 아리랑시장은 정선 사람뿐 아니라 모두에게 특별하고 즐거운 공간이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걸음을 재촉한다. 북적북적한 안으로 들어가자 정선을 대표하는 산채 곤드레는 물론, 신선한 식재료와 음식이 가득이다. 한편에는 메밀전병, 콧등치기 국수 등 향토 음식을 내는 가게가 손님을 맞느라 분주하다. 인심이 어찌나 후한지, 상인들은 귀하다는 자연산 송이와 더덕을 맛보라며 손님에게 덥석덥석 쥐여 준다. 음식에 덩달아 묻어온 정이 따뜻해서일까, 가슴이 훗훗해진다.
그 옛날 삶 속으로, 아라리촌
시장에서 허기를 채운 덕에 몸과 마음이 든든하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정선의 옛 주거 문화가 깃든 마을로 향한다. 강원도는 지리적 특성상 다른 지방보다 겨울이 혹독하고 적설량이 많다. 곳곳에 뻗은 산줄기가 너른 들판을 대신했고, 논농사가 어려워 주로 밭농사를 지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온 선조들은 독특한 구조의 집을 지어 거주했다. 정선군이 약 5000제곱미터(1500평) 규모의 부지에 산간 지방 가옥을 재현해 2004년 개방한 곳이 바로 아라리촌이다.
흙길을 걷자 자박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입구 근방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이 정선에서 썼다는 풍자소설 의 장면 일부를 본떠 만든 동상이 있다. 이야기를 곱씹으며 한 걸음씩 옮기다 보니 도토리나무 껍질을 지붕으로 사용한 굴피집이 나타난다. 도토리나무는 껍질을 벗겨도 스스로 재생하기 때문에 짚을 구하기 어려운 화전민에게 훌륭한 재료였다. 벗겨 낸 나무껍질을 물에 담가 충분히 적신 후 말린 다음 빳빳하게 펴 지붕에 올리고, 강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그 위에 돌까지 얹는다. 이렇게 탄생한 집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을뿐더러 습기도 차단해 추운 겨울 사람을 안락하게 품는다. 이 밖에도 통나무를 쌓아 뼈대를 단단히 한 귀틀집, 얇은 돌을 기와 대신 사용한 돌집, 껍질을 벗긴 대마 줄기를 이엉으로 얹은 저릅집 등을 고스란히 복원했다.
지붕에 집중해 관찰하자 김지선 문화관광해설사가 말을 건넨다. "양반과 평민의 집을 단번에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굴뚝의 소재를 보세요. 굴피집처럼 나무인 경우는 평민, 기와로 만든 곳은 양반집이에요. 나무라 불이 붙을까 걱정하는 분도 계신데, 불 닿는 곳이 아니라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기 때문에 문제없답니다." 옛사람에게는 당연한 이치였겠지만, 현대인은 엄청난 비밀을 맞닥뜨린 듯하다. 이제 재료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며 관람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을 농기구, 마소로 곡식을 찧었던 거대한 연자방아, 마을 사람들이 안녕을 빌었던 서낭당을 차례차례 살핀다. 서낭당에는 누가 차렸는지 모를 제사상이 정갈하다. 시간이 흘렀어도 타인의 평안과 안녕을 비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퍽 정겹고도 반갑다.
'아리랑'으로 짚은 역사, 아리랑박물관
'아리랑'을 부를 때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가락은 서울·경기 지역의 '본조아리랑'으로, 1926년 개봉한 나운규의 영화 주제가로 쓰여 대표성을 띤다. 물론 강원도 지역에도 '아리랑' 가락이 있었으니,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로 시작하는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의 기원은 시간을 거슬러 고려 말까지 올라간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충성스러운 고려 신하 일곱이 정선의 산속에 은거해 산나물로 목숨을 잇는다. 이때 고려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표현하곤 했는데, 훗날 한시에 곡조를 붙인 것이 시초다.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아우라지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불어난 강을 건너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하다 탄생한 '정선아리랑' 애정 편도 전한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민요 특성상 '정선아리랑'의 가사만 800수가 넘는다는 연구 결과가 제기됐으나 아무렴 어떤가. 어디서 누군가가 '아리랑'을 부른다 해도 노래에 담긴 정서와 한은 그대로일 테다.
아라리촌 곁에 자리한 아리랑박물관으로 방향을 바꾼다. 박물관은 2016년 개관한 이래 '아리랑'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층 상설 전시실은 '아리랑'의 어원, 종류 등 관련 자료를 알기 쉽게 정리했다. 지금까지 발견한 음반 중 가장 오래된 '아리랑' 음반의 모형도 전시했다. 에디슨이 발명한 틴포일 축음기로 재생이 가능했단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관람 동선 끝자락의 지역별 '아리랑' 파트다. 제주도부터 북한까지 지역 명인이 부른 '아리랑' 영상을 틀어 놓아 관람객이 직접 비교하도록 했다. 둥근 헤드폰을 귀에 대자 구성진 가락이 귓가로 날아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얼음 왕국을 비행하다, 가리왕산 케이블카
이제 정선을 둘러싼 자연과 마주할 차례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20분을 달려 가리왕산 케이블카 광장에 닿는다. 춘천께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맥국의 갈왕이 피난처로 삼았다는 가리왕산을 두 다리로 올라 속살을 살펴도 좋지만, 이번엔 케이블카를 타고 감상하는 쪽을 택한다. 마침 해가 산꼭대기에 걸리고, 가리왕산이 만든 거대한 그림자가 광장을 덮는다. 별안간 어두워지는 사위에 자연의 경계 안으로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케이블카에 탑승해 해발 1380미터에 달하는 가리왕산 하봉과 가까워진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산그림자를 벗어나자 사방이 유리로 된 캐빈 안으로 햇빛이 들이치고 서서히 주변이 하얘진다. 빛 때문인가 싶어 기웃거리다 나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이 나온다. 가리왕산 꼭대기에 펼쳐진 백색 설원이 여행자를 고요히 맞이한다. 아래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풍경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경관이 더욱 뚜렷하다. 수묵화 같은 산세가 파도치는 듯 강렬하다. 꾸물거리는 안개 사이로 산봉우리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발아래엔 상고대가 지천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흩날려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이 땅을 든든하게 붙들어 맨 태백산맥의 기운과 장대함이 전해져 한동안 말을 잊는다. 잘난 체해도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모두가 땅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태백산맥은 여전히 묵묵하다. 그저 수천, 수만 생명을 변함없이 끌어안을 뿐이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뒤로하고 땅으로 내려오는 케이블카 안, 조그만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한다. 눈 덮인 풍경, 새하얀 풍경, 잊지 못할 겨울 풍경들. 고도가 낮아질수록 정상과 멀어지지만 가리왕산의 모습은 머릿속에 선명하다. 마음이 외로운 어떤 날에 꺼내 볼 이 장면을 고이 새긴다. 정선에서의 기억이 눈처럼 포근히 위로를 건넬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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