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위에서 밤새 안부를 묻다 [영상]

한겨레 2024. 1. 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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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안녕하셨어요’ 어르신 주거 안전 캠페인. 문화예술NGO ‘길스토리’

[똑똑! 한국사회]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한 아이가 있다. 갓 돌이 지나 겨우 걸음마를 뗐다. 바닥이 조금만 미끄러워도 넘어지고 조금만 울퉁불퉁해도 뒤뚱거린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불안하다. 집 안의 문턱들, 식탁이며 의자의 각진 모서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그는 문턱을 없애고 집 안의 모서리를 모두 다듬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들려준 마음 따스해지는 육아 경험담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며칠 전 방문진료 때 만난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의 집은 단층이지만 실제로는 4층이다. 오래된 집은 안방에서 부엌 가는 곳에 큰 낙차가 있어 2층, 부엌에서 현관 가는 길에 한뼘 높이 계단 두개가 있어 3층, 마지막으로 현관에서 마당 나가는 곳에도 무릎 높이 계단이 있어 결국 4층이다. 아이는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타러 부엌으로 갈 때마다 마치 오리가 걷듯 뒤뚱거린다. 무릎 관절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가려면 4층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엌에서 마당으로 곧바로 나가는 쪽문을 만들어놨지만, 지난겨울 그 문을 지나 화장실로 가다 마당의 자잘한 균열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말했다. “여기서 넘어지고 거기서 넘어지고 또 저기서 넘어지고….” 지난 1년 동안 집 안에서 계속 넘어졌고 그날도 손등에 멍든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아이 아빠의 집과 달리, 이 아이의 집 문턱은 그대로다.

아이는 다름 아닌 아흔 노인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와 아흔살 할머니의 몸은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문턱이나 모서리가 위험한 것도 똑같다. 오히려 같은 강도로 부딪치면 할머니의 몸이 더 쉽게 부서진다. 그런데도 세상의 대접은 천지 차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의 문턱은 사라져도 거동 불편한 노인의 집 문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한밤중에 연탄 갈러 문밖으로 나가다 넘어져 이가 깨졌어.” “부엌 넘어가는 얕은 문턱에 걸려 넘어져 얼굴이 멍이 들고 퉁퉁 부었어.” 시골 노인들 집을 방문진료 할 때마다 이런 하소연을 듣는다. 앞으로 몇번이나 더 넘어지고 깨지고 부러져야 집을 바꿔줄까? 그 수많은 넘어짐 속에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노인이 앞으로 또 몇이 나와야 이 사회는 ‘그래, 이 정도 죽었으면 됐다’고 집을 수리해줄까. 대개는 덧없이 울리는 대답 없는 메아리뿐이지만 최근 그 절규에 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방송 프로그램을 함께 촬영할 때 그는 우리 방문진료센터에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 으레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잊고 있었다. 카메라가 꺼지고 두달 뒤,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또 한번 간곡히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했다. 그는 김남길 배우다. 시골 어르신들 집수리 프로젝트 ‘밤새 안녕하셨어요’는 그렇게 시작됐다. ‘부모님이 집에서 낙상을 입어 돌아가셨는데 이런 일을 해줘서 고맙다’며 동참한 이도 있었고,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게 부모님에게도 필요한지 몰랐다. 주말에 미끄럼 방지 패드를 사서 부모님 댁에 가야겠다’는 이도 있었다. 덕분에 한달 남짓 모금하는 동안 목표액의 3배 가까이 모았다. 원래 목표했던 집수리 가구 수도 50가구에서 배 이상 늘었다. 내가 사는 도시는 시청에서 1년 동안 수리해주는 집이 최대 50가구다. 그보다 더 많은 집을 시민의 힘으로 수리한 것이다.

할머니 집 앞에는 호수가 있다. 한겨울 호숫가 얼음판 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미끄럼을 타는 아이도 있고 얼음 위에 구멍을 내고 낚시하는 어른도 있다. 평화롭다. 물 위에 떠 있는, 사람 몸보다 훨씬 얇은 얼음은 어떻게 사람의 무게를 버틸까. 호수를 덮고 있는 광활한 얼음들이 그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무게를 나누어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깨지지 않는 얼음판 위의 평화를 보면서 깨닫는다. 함께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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