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 불후의 열연 양규 역 지승현 “장군님 알리고 싶은 생각만, 촬영장에 다녀가신 느낌”[스경X인터뷰]
KBS2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의 지난 7일 방송에서, 적어도 그 회차만큼은 양규 장군 역의 배우 지승현과 김숙흥 장군 역의 배우 주연우는 주인공이었다. 고려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섬멸하기 위해 애전 전투에 임했지만, 포로들이 피해갈 시간을 벌기 위해 두 사람과 결사대는 죽음을 각오했다.
결국 적장인 야율융서(김혁)까지의 거리는 300보. 피 칠갑을 한 양규와 김숙흥, 결사대는 끝까지 적을 놓지 않는 무관의 모습을 보이면서 사료로 남아있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 모습은 두 배우의 열연, 적절한 컴퓨터그래픽(CG) 그리고 현란한 편집으로 비장미가 더해졌다.
통상 드라마의 중간 죽음으로 퇴장하는 이들에게 쏟아지던 관심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규 장군에 대한 시청자들의 울림은 컸다. 시청률과 화제성 순위 등에서 양규 장군의 전사장면은 우리나라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배우 지승현이 있었다.
“드라마를 시작할 때는 양규 장군님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늘 스태프들과 수십 번 나눴던 이야기가 있어요. 연기를 잘해서 양규 장군님을 꼭 널리 알리겠다는 각오였죠.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양규 장군의 전사를 놓고 어떤 댓글은 “TV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싶었다”고 했고, 최근 MBC ‘연인’에서 길채(안은진)의 무심한 남편 구원무로 들었던 ‘욕’들도 모두 찬사로 바뀌었다. 그는 “어떤 댓글에서는 ‘그때는 미워했지만, 지금은 사랑합니다’라고 적으셨다.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양규 장군과 관련된 사료에서 비롯된 대본이었어요. 난중일기도 읽었었고요. 거기서 느낀 것은, 그 역시 사람이다. 전쟁 중에도 술을 먹고, 동료들과 언쟁도 벌이는구나 싶었어요. 배역을 고민하다 안성기 선배님이 영화 ‘실미도’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군인은 자기 몫을 하면 나라가 저절로 잘된다’는 대사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그저 진심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승현은 실제 학사장교 출신으로 군 복무를 했고, 전방 GOP 근무경험도 있다. 물론 상상을 통한 연기였지만, 군인의 정신과 군인의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기억이었다. 특히 양규 장군의 장면을 촬영할 때, 기이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던 기억은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한솔 감독님께서 매번 촬영 ‘컷’을 외치시면서 ‘양규 장군님이 오셨다’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실제 흥화진 전투의 양규 장군 분량을 편집하시면서 네 번을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애전 전투 촬영 3일 중 마지막 날 눈이 와서 인공눈이 필요 없게 됐고요. 첫 촬영 때는 비가 그쳤어요. 정말 장군님이 촬영현장에 오셔서 저희를 도와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애전 전투 마지막 촬영이 있던 지난달 19일은 공교롭게도 지승현의 생일이었다. 김한솔 감독은 “양규 장군이 돌아가신 날, 배우 지승현이 다시 태어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사 장면이 공개된 후에는 많은 호평과 함께 ‘양규 장군이 지승현을 살렸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만큼 이 역할은 지승현에게 있어서 남달랐다.
결국 지승현의 활약은 고려의 국난극복기에 있어 강동 6주를 회복한 서희나 귀주대첩의 강감찬 외에도 숨겨진 역사적 영웅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다. 남녀의 로맨스를 다루는 퓨전사극의 존재도 재미를 주지만, 실제 역사에 기반한 정통사극의 가치는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는 양규 장군의 전사로 강감찬(최수종)과 현종(김동준)의 서사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고려의 국난극복사를 다루게 된다.
“지난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상과 인기상을 수상했습니다. 양규 장군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마음을 쏟았는데 상도 받게 돼 벅찬 마음이었어요. 인기상이 기억에 남습니다. 양규 장군의 캐릭터로 인기를 얻게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촬영하면서 더욱더 전쟁이 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의 우리는 그 선조들의 업적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2007년 MBC 드라마 ‘히트’에서 형사 단역으로 이름을 알린 지승현은 18년을 묵묵히 걸어왔다. ‘태양의 후예’ 북한군 안정준, ‘왜 오수재인가’의 악역 최주완, 영화 ‘바람’의 김정완 등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다시 배역 속으로 걸어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의 바람이 조금씩 이뤄지듯 지난해에는 ‘형사록 시즌 2’와 ‘7인의 탈출’의 특별출연부터, ‘연인’ ‘최악의 악’ ‘고려 거란 전쟁’까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배역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역시도 배우를 하며 때론 미래가 안 보이는 캄캄한 터널에도 있었지만 늘 인내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불굴의 의지로 길을 걸어갔다.
“‘내 일이 안 될 때는 타인을 축복하라’는 책 속의 글이 있습니다. 타인을 질투하면 에너지가 건너가고, 에너지를 주면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도 양규 장군님을 알리려 했는데 제가 에너지를 받았습니다. 양규 장군을 연기하면서 진심을 담는 연기 외에도 뭐가 분명한 목표를 갖는, ‘플러스알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양규 장군님, 장군님으로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부족했지만 진정성을 가졌습니다. ‘코리아’가 ‘코리아’로 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경헌 기자 azima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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