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덕질’이 수상해 [신년기획]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가수 임영웅의 전국 투어 콘서트 ‘아임 히어로’(IM HERO)의 서울 공연 6회 차 티켓은 지난해 9월 판매 시작 1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최대 트래픽인 약 370만을 기록했는데, 예매 시간에 맞춰 사이트에 접속하고도 30만여 명의 대기 인원을 확인했다는 인증 글들이 쏟아졌다. 암표 시장에서는 정가 16만 원짜리 티켓 2장이 약 2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임영웅 팬들의 소비는 단순 콘서트 관람이나 관련 굿즈 구매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20년 쌍용차(현 KG모빌리티)가 임영웅을 모델로 내세운 차량이 단일 모델 기준 판매량 53% 증가란 대기록을 써 화제를 모았다. 자동차뿐 아니라 건강기능식품이나 치킨, 피자, 죽류 등 식품, 샴푸 등 생활용품과 남성복, 정수기 등 그가 뜨면 ‘완판’이 따른다.
‘임영웅 파워’에는 5060으로 통하는 중장년 팬덤이 있다. 뒤늦게 ‘덕질’(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에 빠졌지만, 누구보다 ‘덕질’에 진심인 이들이 엔터 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했다. 효도 공연 정도를 즐겼던 수동적 소비자에서 적극적 구매자가 되며, ‘팬덤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중장년 팬들은 트로트 시장이 활성화되며 결집하기 시작했다. TV조선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시리즈의 성공이 이들의 잠재된 ‘덕력’을 깨웠다.
중장년의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문화적 영향을 넘어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간과 자본력을 갖춘 군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단순히 엔터계를 넘어 산업 전반을 움직일 정도의 경제 효과를 내고 있다.
5060의 팬들 입장에서는 새 취미 활동이 생겨 행복하다는 반응이 다수다. 좋아하는 가수를 상징하는 색깔의 티셔츠를 맞춰 입고, 공통의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는 점에 많은 의미들을 부여한다. 우울증을 극복하게 됐다는 경험담들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장년 팬덤의 규모가 커지며 역기능을 우려하는 시선 역시 커지고 있다. K팝 팬덤의 조직 문화 중 부정적 요소로 꼽히는 일부 활동들이 중년의 팬들에게 학습, 흡수됐단 저적이 나오고 있다. 경쟁 구도를 기반으로 한 팬덤 간 편가르기나 경제력에 따른 계급화 양상이 드러나며, 건전한 팬덤 문화를 해칠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물론 모든 현상에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따른다. 이제는 하나의 현상이 된 ‘중년의 덕질’ 역시 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선은 있어 보인다. 과유불급(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려야 할 때라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 5060의 새 취미는 ‘덕질’
◆ “소속감과 연대감 느껴 행복”
60대 후반의 B씨는 가수 김호중의 팬카페에서 유명 인사다. 다양한 활동을 하다 보니 닉네임만 대면 웬만한 팬들은 다 B씨를 알아본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보냈지만 어느 순간 헛헛한 감정이 들었다는 B씨는 요즘 팬클럽 활동을 하며 10대 소녀로 돌아간 듯 설렘 가득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50대 중반의 A씨는 최근 가수 영탁이 참석하는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역시 영탁의 팬인 세 명의 지인들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폭설로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스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의 도로 상황도 만만치 않았지만, 영탁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웃었다.
60대 초반의 C씨는 지난 10월 임영웅의 신곡 발매를 앞두고 함께 임영웅을 좋아하는 팬들과 함께 카페에 모여 스터디를 했다. 주제는 음원 차트에서 순위를 올리는 방법인데, 선생님 역시 임영웅의 팬으로 자원봉사를 통해 이들을 가르친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임영웅의 신곡이 올해 발매된 곡 중 가장 빠르게 음원 시장 1위에 오르게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외의 아미(방탄소년단의 팬덤명)는 한국의 히어로(Hero)라는 가수가 궁금할 따름이다. 신곡만 냈다 하면 글로벌 시장서 영향력 있는 차트를 석권하지만, 유독 국내 차트에서는 히어로란 가수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덕질’이라는 새로운 취미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장년층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눈 뜨자마자부터 잠들기 전까지 좋아하는 가수 관련 활동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며 팬 활동을 하며 바뀐 일상들을 쉼 없이 늘어놨다.
여기에는 삶 자체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가정사나 개인적 아픔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고 상처가 치유되고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해당 가수를 신격화하기도 했다.
자녀들이 모두 가정을 꾸린 후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가수의 팬 활동을 하며 생긴 ‘동지’들과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단 이야기도 주를 이뤘다.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라며 수년간 앓아왔던 우울증과 이별하게 됐단 팬들도 다수였다.
전문가들은 중장년 팬들이 ‘덕질’을 하며 느끼는 이러한 변화를 자기 존중, 소속, 애정 욕구 해소에 따른 긍정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고생한 세월에 대한 보상의 심리로 ‘덕질’에 더 몰입하게 된다고 보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진 않는 분위기다.
◆ 용돈·후원 통장은 기본, 헤어숍·명품 매장 선결제까지…
◆ ‘투자금’ 따라 계급 나뉘는 팬덤
물론, 긍정적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장년 팬덤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며 ‘역기능’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역기능 중 자본력에 따른 계급화에 큰 우려를 드러냈다. 팬덤 커뮤니티서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는 것으로 스타에 대한 애정의 정도를 확인하다 보니, 무리한 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중장년의 팬들은 행복한 취미활동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10대와 20대가 주가 되는 아이돌의 팬들 역시 이 취미 활동에 투자를 하지만, 단위가 다를 때가 많다.
굿즈나 앨범을 구매하고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는 것부터 사이즈가 다르다. 스타의 굿즈를 진열하기 위한 세컨하우스를 마련했단 한 중장년 팬의 사례는 방송에도 나왔다. 앨범을 수억 원어치 구매했단 인증글부터, 콘서트 티켓 확보를 위해 매크로 업자에게 수천만 원을 건넸단 팬도 등장했다.
좋아하는 스타가 광고하는 제품은 일단 ‘완판’시킨다는 게 목표인데, 광고 제품이 단순 식품이나 의류에서 차량이나 전자제품 등으로 확장되며 이 역시도 부담이 커졌다.
순수한 마음으로, 필요에 의해 지출을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보여주기를 위한 과열 양상이다. 자신이 소속된 팬 커뮤니티에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팬덤 사이에서 가수에게 금전적으로 기여한 정도를 놓고 계급을 나누는 불편한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다.
트로트 가수들을 매니지먼트하는 한 중소 기획사 D 대표는 “소위 말하는 팬 그룹 내에서도 가수를 위해 지출한 액수가 많을수록 목소리를 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기를 못 펴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일부 팬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며 커뮤니티를 떠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가수들이 이러한 팬들의 성향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거다. 용돈 통장이라는 명목으로 개인 계좌를 통해 팬들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일은 비일비재한데, 이 통장에 찍히는 금액에 따라 팬들을 대하는 가수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 어느 트로트 가수의 수상한 ‘활동비 0원’
심지어 일부 가수는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값을 매겨 판매하기도 한다. 방송 오디션 등에 나와 나름 유명세를 탄 가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신동 출신으로 종편 트로트 오디션 등에 출연했던 한 트로트 가수는 팬들과의 사적인 식사 자리를 종종 갖는다. 일대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고 다대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이뤄진다면 다행이지만 해당 가수에게 이는 심심치 않은 용돈벌이다.
해당 가수는 활동을 거듭해도 활동비 지출이 거의 없다. 티브이데일리 취재에 따르면 헤어·메이크업숍부터 의상비 등을 일부 팬들이 선결제해주는 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상복 역시 명품 매장에 선결제를 해두고 가수 본인이 원하는 옷을 골라서 가져가는 식이다. 월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사실상 주유비 정도만 활동비 명목으로 들어가는데 이 역시도 용돈 봉투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가수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일 수 있지만, ‘투자’가 이뤄진 만큼 개입도 만만치 않다. 중소 기획사에서 트로트 가수 등을 기획, 매니지먼트 하고 있는 E 이사는 “모 가수는 자신의 의지대로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 없다. 선결제를 해둔 팬이 앞머리를 내리는 것을 좋아하면 내리고, 이마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면 그렇게 하는 거다. 직접 숍의 실장에게 오더를 넣기도 한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 가수의 일상복이 지나치게 한 명품 브랜드의 옷으로 통일돼 있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역시 한 팬의 ‘선결제’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단 사례도 전했다. E 이사는 “편지 속에 용돈을 함께 넣거나, 후원 계좌를 여는 것 등은 이제 당연스레 이뤄지는 일이지만, 활동비 등을 지원하는 것은 의도가 불순해 보인다”라며 “가수나 소속사가 여기에 선을 그으면 되지만, 이들이 용인하기 때문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건전한 팬 문화를 해치는 행위라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암암리에 이뤄지는 터라 탈세의 온상이 되고 있단 지적도 있다. 특히나 용돈 통장의 경우 거액의 현금을 이체하거나, 돈 봉투를 건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소속사와도 관계없이 가수 개인적으로 만들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아 더 관리가 어렵다고 E 이사는 전했다. 팬카페에서 이 계좌를 운영하다 사고가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스타는 곧 내 아들·딸? 과한 ‘요구사항’에 우는 소속사
투자가 들어간 만큼 입김도 만만치 않다. 단순 소비자에서 능동적 참여 주체가 되며, 팬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중장년의 팬들의 특이사항 중 하나는 스타를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한다는 거다. 자녀 교육을 마친 중장년의 팬의 눈에 10~30대 트로트 가수들을 자식 같고 손자·손녀 같을 수 있다.
이에 웬만한 구설은 다 감싸 안는 편이다. 사생활로 인한 논란이 터져 나와도 논란의 내용 보다는 극복에 초점을 맞춰 해당 가수를 응원하는 경우가 다수다.
이렇다 보니, 극성 학부모가 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스케줄은 물론 식단이나 스타일링에 관려하며 디테일한 요구사항을 내놓곤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 역시 시간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조직적으로 회사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트럭이나 현수막 등을 내걸어 자신들의 주장을 전한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 언급했듯 일부는 직접 헤어·메이크어숍이나 의복숍에 선결제를 해두고 직접 스타일링에 관여한다.
트로트 가수 포함 다양한 연예인들을 매니지먼트하고 있는 연예 기획사의 F 실장은 “아이돌 팬덤의 경우 요구사항에 대한 정정 내용을 공지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면 납득하는 편인데 중장년의 팬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에 대해 당장 수정을 요구하고, 그렇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의를 해 회사의 업무가 마비될 때가 있다”라고 전했다.
◆ 업계의 목소리
트로트 시장 등을 활성화시켜 준 중장년의 팬들은 기획사 입장에서도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팬들의 행동이 선을 넘어서는 양상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D 대표는 “중장년의 팬들이라고 해서 다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자로 나라에서 받은 생활비를 모아 가수에게 용돈이라며 건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팬 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팔고, 대출까지 얻었다는 한 팬의 이야기도 전했다. 이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겼지만, 투자한 돈과 시간이 있어 팬 활동을 멈추지도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팬 커뮤니티를 소속사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가수들이 개인적으로 쓰는 용돈, 후원 통장을 없앤다면 팬들의 부담을 조금 더 덜어줄 수 있을 것이란 방책을 내놓을 수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E 이사는 “가수들 입장에서도 인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인 가수들이나 다른 주목받는 가수들이 나올 경우 영향력이 줄고 이는 수입으로 바로 연결이 된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개인적으로 받는 용돈이나 후원금이 수입에 큰 몫을 차지하는 가수들도 있다. 쉽게 없애기 어려운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가수들 입장에서도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게 수십년 동안 매니지먼트를 해온 업계 관계자들의 주된 의견이다. 소위 돈이 되는 팬들에 치중되는 경우, 이러한 팬들에 의해 활동 방향 자체가 좌우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가수로서의 경쟁력을 키우지 못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식사 이벤트 등 팬서비스를 가장한 개인 만남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보진 않았다. 친근한 이미지를 위한 선택이라고 포장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이미지 소모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수와 팬의 관계, 일종의 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팬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에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속사 고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하는 참견은 오히려 가수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단 이유에서다.
F 실장은 “팬들의 조언을 귀에 새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팬이 없는 가수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것”이라면서도 “소속사 역량 밖의 요구사항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거나, 타 가수와의 경쟁을 부추기는 등의 행동은 지양해달라”고 호소했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티브이데일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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