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북유럽인 큰 키와 만성 신경질환은 유목민의 유산
유목민이 북유럽에 다발성 경화증 물려줘
동유럽인 알츠하이머병은 수렵채집인 유산
지역별 질병 차이 이해하고 치료할 길 열어
북유럽인은 동쪽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이 물려준 유전자 덕분에 남유럽인보다 키가 큰 것으로 밝혀졌다. 좋은 유전자만 준 것이 아니다. 유목민은 북유럽인에게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도 전했다.
과학자들이 지난 1만5000년 동안 유럽인의 유전자를 구성한 역사를 재구성했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유럽인들의 유전 정보를 해독해 특정 질병에 잘 걸리는 경향이나 신체 특성이 언제 어디서 유래했는지 밝혔다.
덴마크 코펜하겐대의 에스케 윌레슬레브(Eske Willerslev)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연구진은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4편의 논문에서 “고대 유럽인 1600여명의 유전자 분석 정보를 오늘날 유럽인 41만명의 유전 정보와 비교해 1만5000년 동안 인류의 이주과정과 그들이 남긴 유전자 유산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농경 전해지면서 유럽인 유전자 동서로 갈려
연구진은 중석기와 신석기인 317명의 유골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해독했다. 덴마크 룬드벡 재단이 제공한 고대인 1300여명의 유전자 정보도 분석했다. 이렇게 확보한 고대인 1600여명의 유전정보를 영국 바이오뱅크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유럽계 백인 41만명의 유전정보와 비교했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오늘날 유럽인의 유전적 다양성은 과거 유럽에서 있었던 세 차례 대규모 인류 이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먼저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나 약 4만 5000년 전 유럽에 정착했다. 이어 1만 1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농경민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5000년 전 오늘날 러시아 남부의 볼가강과 돈강을 아우르는 폰틱 대초원에서 유목민들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유럽의 인구가 수렵채집인에서 농경민으로 바뀌는 과정은 북유럽 발트해에서 남동유럽과 서아시아 사이 흑해까지 이어지는 게놈(유전체) 경계선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에 농경이 도입되면서 경계선 서쪽에서는 대규모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다. 반면 경계선의 동쪽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연구진은 중동에서 하던 농업이 동쪽의 기후에 맞지 않아 수렵채집 경제가 서쪽보다 3000년은 더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목민 이주하면서 질병 유전자 전달
연구진은 대규모 이주가 오늘날 유럽인에게 남긴 유산도 조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다. 이 병은 인체의 면역세포가 외부 침입자 대신 척수나 신경세포를 감싼 보호막인 미엘린을 공격하면서 발생한다. 미엘린이 파괴되면 신경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온몸이 굳어버리고 시력마저 손상된다.
특이하게도 북유럽의 다발성 경화증 환자가 남유럽보다 두 배나 많다. 연구진은 다발성 경화증 위험을 높이는 유전자가 폰틱 대초원에 살던 유목민인 얌나야(Yamnaya) 집단에서 발생했으며 나중에 북유럽으로 퍼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유전자 분석 결과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가 북유럽에 나타난 시기는 5000년 전 유목민의 이주와 일치했다.
얌나야인들이 가진 다발성 경화증 유전자는 대초원에서는 오히려 도움을 줬다. 당시 인구가 늘면서 가축 전염병들이 창궐했다. 연구진은 다발성 경화증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는 양이나 소를 통해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면역력을 제공했다고 추정했다. 논문 공동 교신저자인 영국 옥스퍼드대의 라스 푸거(Lars Fugger) 교수는 “다발성 경화증이 선사시대의 특정 환경에 대한 유전적 적응의 결과임을 앎에 따라 이 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유럽에서 지역에 따라 특정 질병의 발생 빈도가 다른 것도 과거 인류 이주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오늘날 남유럽인은 조울증에 걸리기 위한 유전적 특징이 있다. 이들은 주로 서쪽에서 온 농경민에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반면 동유럽인은 유전적으로 알츠하이머와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더 크다. 이는 처음 유럽에 이주한 수렵채집인들의 유산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북유럽인이 남유럽인보다 키가 큰 것은 동쪽에서 온 유목민이 물려준 유전적 특징이다.
◇전 세계 연구자 175명 공동 연구
이번 연구는 코펜하겐대와 옥스퍼드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호주 커틴대 등에서 175명의 연구자가 진행했다. 공동연구진은 “이번 결과는 다발성 경화증이나 다른 자가면역질환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약을 가져왔다”며 “앞으로 자폐증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양극성 장애 같은 질병과 관련된 유전적 특징을 더 많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보완할 점도 남아 있다. 미국 아이칸 의대의 사미라 아스가리(Samira Asgari) 교수는 이날 네이처에 실린 논평 논문에서 “감염을 막는 데 기여했던 유전적 변이가 나중에는 과잉 면역반응을 불러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유발했다는 가설은 가능성은 있지만 구체적 증거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미라 교수는 가설을 입증하려면 자가면역질환의 위험과 특정 병원체에 대한 면역반응을 연결하는 생물학 메커니즘을 규명할 실험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865-0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705-1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618-z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8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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