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 차 크다고 포기하면 안된다는 걸 배웠죠”

이영빈 기자 2024. 1. 1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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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3연패 겨냥 펜싱 구본길
지난 3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구본길은 “아무것도 모를 때 땄던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은 마냥 기뻤고, 2021년 도쿄 금메달은 분에 넘친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번 파리에서도 꼭 금메달을 따 또 다른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그저 칼이 멋져 보여서 시작한 펜싱이었다. “중학교 점심시간에 체육관에서 펜싱하는 걸 처음 봤어요. 칼을 휘두르는 게 멋있어 보였던 것 같아요. 빼꼼빼꼼 보던 저를 눈여겨보신 선생님이 권해서 시작하게 됐죠.”

칼이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놀랐다던 15세 소년 구본길(35)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다 금메달 타이기록(6개)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빛났다. 2012년 런던 올림픽,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남자 단체전 금메달 2개를 수확했다. 펜싱 단체전이 2016년 리우 대회에서는 열리지 않아 해당 종목 2연패(連覇)였다. 이제는 그를 빼놓고는 한국 펜싱을 말하기 어렵게 됐다.

노장 반열에 오른 구본길. 그는 “진천 선수촌 택배를 건네주는 분이 ‘이제 코치 하시는 거죠’라고 하더라”며 “국가 대표를 17년 동안 했으니 오래하긴 했다”고 했다. 오랜 시간에도 칼끝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지난 5월 파리 올림픽을 위한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8명 안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국제 대회들에서 랭킹 포인트를 쌓아 상위 4명 안에 들면 오는 7월 파리로 향할 수 있다. 구본길은 “젊은 선수들에게는 없는 노련미가 이제는 조금 생겼다. 파리도 자신 있다”고 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구본길은 단체전에서 빛난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3개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만 9개. 개인전(3개) 3배에 달한다. “스스로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혼자 경기를 펼치는 개인전과 다르게 단체전은 같은 팀 경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있거든요. 우리 선수가 나서는 동안 뒤에서 상대 선수 습관부터 오늘 몸 상태까지 면밀히 관찰하죠.” 경기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갔다. “펜싱은 가위바위보라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가위로 매번 점수를 따내는 선수에게는 가위를 못 내게 제가 바위를 내면 되는 거예요. 상대가 뭘 내는지 알려고 잘 관찰하는 거죠.”

구본길은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초심을 떠올렸다. 남자 사브르 개인 8강전에서 중국 선전펑에게 10-14로 밀리고 있었는데, 내리 5점을 따내면서 15대14로 승리했다. “이 정도 점수 차면 30대 들어서는 그냥 포기했어요. 괜히 애쓰다가 근육에 무리가 가서 부상을 당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왠지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이긴 거예요. 기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씁쓸하더라고요. 예전에 포기한 경기들도 사실 이길 수 있었던 것 아니었나. 놓친 경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었죠. 그래서 앞으로는 처음 펜싱 칼을 잡았을 때처럼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파리에서도 그럴 겁니다.”

2024년 1월 3일 충북 진천선수촌 웰컴센터에서 파리올림픽 앞두고 펜싱 구본길 선수가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구본길은 지난해 3월 득남했고, 지금 아내 배 속에 둘째가 있다. “아내가 입덧하면서 육아까지 하느라 많이 고생해요. 그런데 여러 세계 대회를 가느라 곁에 있는 시간이 적죠. 파리 올림픽을 마친 뒤에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해요.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선수의 길에서 많은 부분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펜싱은 프랑스에서 생겨난 종목이다. 그래서 오는 7월 남자 펜싱 단체 대표팀이 종주국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것이라는 기대도 받는다. 정작 구본길은 “펜싱이 세계화가 많이 됐다. 프랑스가 종주국이라 해도 강팀은 아니다. 파리에서 금메달을 따서 기쁘다기보다는, 그냥 올림픽 금메달이라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 금메달이 없는 후배들에게 꼭 경험시켜 주고 싶어요. 그 황금색 물체를 목에 거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정말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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