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던 갈라파고스의 나라... 에콰도르, 갱단 소굴 됐다

조성호 기자 2024. 1. 1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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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조직간 충돌로 범죄 급증
9일 에콰도르 과야킬의 TC 방송국에서 생방송 도중 복면을 쓰고 침입한 괴한이 방송 진행자와 스태프에게 총을 겨누고 협박하는 모습이 실시간 화면에 잡혔다. 에콰도르는 현지 최대 갱단 두목의 탈옥 이후 전국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에게 통행 금지령까지 내렸지만, 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AP 연합뉴스

“마이크 연결해! 마피아를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겠어.” 9일 오후 2시 20분. 남미 에콰도르 공영방송 TC의 생방송 스튜디오에 10여 명의 괴한이 들이닥쳤다. 복면을 쓰고 다이너마이트를 든 이들이 진행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한 괴한은 손에 든 폭탄을 한 출연자의 상의 앞주머니에 꽂아넣기도 했다. “쏘지 마세요”라는 울부짖음이 섞인, 충격적인 ‘범죄 생중계’는 15분간 전파를 타며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후에야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그래픽=이철원

갈라파고스와 안데스산맥으로 이름난 평화의 나라였던 에콰도르가 마약 갱단의 손아귀에 장악당하면서 큰 혼란에 휩싸였다. 2000년대 들어 남미의 마약 갱단 활동이 늘어남과 동시에 좌파 성향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 집권(2007~2017) 시 미국 마약단속국과 협력을 중단하는 등 치안의 고삐가 느슨해지자 갱단이 몰려들어 사회 곳곳을 짓밟는 상황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한때 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였던 에콰도르는 갱단이 전역에서 폭력을 부추기고 있는 새로운 ‘나르코(마약)의 네트워크’의 일부가 됐다”고 최근 전했다. 상황이 비슷한 칠레·코스타리카도 이 신설 ‘네트워크’에 들어간다.

지난 며칠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에콰도르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9일 공영방송에 난입한 괴한은 마약 조직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이날 하루 동안 교도소 최소 여섯 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교도관과 경찰이 납치됐고, 병원 다섯 곳이 갱단에 의해 장악됐다. 대법원장 집 앞에선 폭탄이 터졌다. AFP는 하루 사이 최소 10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7일 에콰도르 내 최대 갱단 ‘로스 초네로스’의 수괴인 아돌프 마시아스(44·일명 피토)가 교도소에서 탈옥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후 다니엘 노보아(37) 에콰도르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갱단들은 ‘맞짱’을 뜨자는 듯 더 과격한 폭동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키면서 경찰관을 납치하고 보란듯 교도소를 탈출하는 상황이다.

2023년 8월 에콰도르 과야킬의 제8구역 교도소 내 최대 보안시설인 더 락으로 이송되는 로스 초네로스 범죄조직 보스 아돌포 마시아스. 에콰도르 경찰 당국은 수감된 마시아스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1월 7일 밝혔다. /AFP 연합뉴스

푸른 바다와 깊은 숲 등 야생 그대로의 자연으로 이름난 관광 명소 에콰도르에 갱단이 대거 진출해 날뛰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의 무대이자 한때 최악의 마약 소굴이었던 이웃 국가 콜롬비아가 미 마약단속국과 공조 수사 등으로 마약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남미 마약 조직은 새로운 근거지가 필요해졌다. 2009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좌파 성향 라파엘 코레아가 때마침 반미(反美) 행보를 보이며 미 해군 기지를 폐쇄하고 미 마약단속국과의 협력을 단절하자 마약 조직이 하나둘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래픽=이철원

코레아가 2017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후 집권한 레닌 모레노 대통령도 같은 당 소속이며, 2021년 퇴임 때까지 비슷한 노선을 취했다. 에콰도르에 있던 군소 갱단은 10여 년에 걸쳐 몸집을 불렸고, 이젠 전 세계 코카인을 좌우하는 대형 유통업자로 성장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코레아 대통령이 갱단에 사실상 문을 열면서 에콰도르의 치안은 빠르게 악화돼 지금의 지경에 이르렀다. 2018년까지만 해도 남미 전체에서 넷째로 낮았던 살인율(10만명당 5.8건)은 불과 4년 사이에 26.7건으로 치솟았다”고 전했다. 마약 범죄로 악명 높은 멕시코를 앞서는, 남미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살인율이다. 지난해 대선에선 ‘조직 범죄 소탕’을 내건 대통령 후보가 갱단에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2024년 1월 9일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34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범죄조직 로스 초네로스 지도자 아돌포 마시아스가 실종된 후 다니엘 노보아 에콰도르 대통령이 6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군인들이 이날 치안유지를 위해 교도소에 도착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문제는 에콰도르를 이미 장악한 폭력 조직을 정리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갱단 조직원을 잡아 교도소에 넣는다 해도 많은 교도소가 여러 갱단에 이미 ‘접수’된 상태여서 조직력만 강화되기 십상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교도소 내 마약 조직 간 패싸움도 빈번하다. AFP에 따르면 2021년 이후 수감자 간 충돌로 사망한 사람만 460명 이상이며, 많은 수가 참수되거나 산 채로 불에 탔다.

☞에콰도르

적도가 지난다는 이유로 ‘적도’를 뜻하는 스페인어인 에콰도르가 국명이 됐다. 바나나 등 농수산물이 주력 수출품이다.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하면서 언급해 유명해진 갈라파고스 제도가 에콰도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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