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1300억 기부 이란왕실 주치의 이영림 “50m 수영장 2000평 집에서 거주” [SS리뷰]

박효실 2024. 1. 1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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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유퀴즈 온더 블럭’


[스포츠서울 | 박효실 기자] 모교 경희대에 개인 기부액으로는 역대 최고인 1300억원을 기부한 이영림(83) 영림한의원 원장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0일 방송된 tvN ‘유퀴즈 온더 블럭’에서 1970년대 이란으로 떠나 이란 왕실의 주치의이자 건설사 대표로도 활약한 이 원장의 놀라운 인생 역정이 공개됐다.

이 원장은 지난 2016년 1300억원을 모교에 기부한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가 아직도 노벨의학상을 못 탄 게 한이다. 노벨 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자는 결심으로 기부했다”라고 통 큰 포부를 밝혔다.

1974년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이 원장은 은사인 신상진 교수의 꿈을 돕기 위해 이란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방 양방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소를 지어서 연구하면 노벨의학상을 탈 수 있다고 하셨다. 연구소를 세울 돈을 벌자 싶어서 이란으로 갔다”라고 말했다.

tvN ‘유퀴즈 온더 블럭’


그는 “당시 이란 대사가 담궐, 견비통을 앓고 있었는데 침을 7번 맞고 치료가 됐다. 이란도 양고기를 많이 먹는데, 육식을 많이 먹는 경우 몸 여기저기에 울혈처럼 맺혀서 통증을 만든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신기한 치료를 받은 대사가 이란 팔레비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란과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당시만 해도 이란 비자도 쉽지 않을 때였다. 당시 팔레비 국왕이 ‘백색혁명’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걸 내가 번역한다는 내용으로 비자를 발급해서 한달 정도 머물 생각으로 갔다. 그런데 3년을 붙들려 있었다. 하루 환자 100명을 봐도 1년간 예약이 차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란에서 ‘골드핑거’로 불렸던 이 원장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월급은 한국의 2배인데 오전만 근무한다. 이란은 원래 오후는 낮잠시간이라 부업도 가능해 산부인과에서 일했다”라고 말했다.

건강을 혈색으로 진단하는 찰색에 대해서 그는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어 그런지 찰색이 좋은 사람이 별로 없다”라더니 MC 유재석과 조세호의 찰색에 대해서도 “별로다”라며 직격해 웃음바다가 됐다.

하지만 1979년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일으킨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며 시대상황은 바뀌었다. 그는 “당시에 이란에 거주 중이던 외국인들 의사도 모두 내쫓았다”면서 “당시 내가 뭘 했냐면 한국인 450명, 이란인 2000명을 거느리고 건설회사를 운영 중이었다”라고 말해 놀라움을 안겼다.

tvN ‘유퀴즈 온더 블럭’


한의사에서 돌연 건설사 대표라는 간극에 유재석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라며 깜짝 놀랐다.

이 원장은 “이란이 당시 건설붐이었다. 고압선 가설 공사를 하면 한국에 의학연구소 지을 돈을 벌겠더라. 그래서 알아보니 내 환자가 마침 입찰을 봐둔 건설공사 담당자더라. 그래서 침을 딱 꽂은 상태에서 ‘내가 건설업을 하고싶다’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던 환자에게 그는 “내가 공사를 수주하면 한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와서 할 수 있다. 전기공사도 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 했다고. 그렇게 건설사를 운영하며 이 원장은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이란은 집에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집을 알아보니 2000평 집이 있다더라. 국제규격 50m 수영장이 있고, 식탁 다리가 18K 금이었다. 개하고 나하고 둘이 살았는데 그 집에 아름드리나무가 24그루였다”면서 “1979년도에 그 집을 단돈 200달러(한화 26만원)에 샀다. 혁명 정부에 안 뺏기고 지켜줄 사람 같다며 줘서 한국 오기 전까지 살았다”라고 말해 감탄을 자아냈다.

혈혈단신 한국을 떠난 지 18년 만인 1994년 고국으로 돌아온 이 원장은 2000평 집에 살다가 37평 압구정 아파트에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그는 “한국에 와서 37평 아파트에 왔더니 앞에도 창, 뒤에도 창, 옆에는 문, 이건 비행기 탄 줄 알았다” 라고 한탄해 폭소를 자아냈다.

무려 1300억을 후학을 위해 기부했지만 정작 그는 맞춤 정장을 45년간 입을 정도로 검소했다. 산에 갈 수 있는 국산 SUV 1대가 유일한 차량이었다. 그는 “자동차가 너무 오래된 거라 매연도 나오고, 새 차를 사라고들 한다. 자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차는 사서 뭐하겠나”라며 웃었다.

이 원장은 마지막으로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노벨상 못 받은 게 아쉽다. 우리 국민이 독일 국민만 못지 않다. 세계 3위까지는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냐. 젊은 분들에게 부탁한다”라고 당부를 전했다. gag11@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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