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살인인플레’ 덮친 이 나라…전기톱으로 포퓰리즘 도려낼까

안갑성 기자(ksahn@mk.co.kr) 2024. 1. 1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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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탈출하려는 아르헨
밀레이, 집권 한달새
페소화 50% 평가절하
정부부처 절반 폐지 등
고강도 개혁안 추진
한국, 달빛철도·기초연금 인상 등
총선 앞두고 퍼주기 정책 쏟아져
포퓰리즘, 현상유지만 해도
부채비율 2030년께 아르헨 넘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후보 시절 유세 현장에서 전기톱을 들고 정부 지출 삭감을 주장하고 있는 모습. [AP = 연합뉴스]
“나라에 돈이 없어서 경제 충격 요법 외엔 대안이 없다. 단기적으로 경제가 악화되겠지만,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작금의 초인플레이션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 (지난해 12월 10일 대통령 취임식 연설)

집권 한 달을 맞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기세가 무섭다. 경제학자 출신의 괴짜 정치신인은 대선 유세 기간 ‘전기톱’까지 들고 나와 방만하게 운영되던 정부 지출을 삭감하겠다고 약속하며 당선됐다. 강도 높은 밀레이표 개혁 드라이브로 아르헨티나의 고질병인 포퓰리즘(페론주의) 경제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밀레이 행정부는 지난 한 달 간 ‘경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960여 개에 달하는 강도 높은 경제 개혁 패키지를 쏟아냈다. 지난달 20일 300여 개의 경제조치가 담긴 긴급 대통령령을 발표했고, 일주일 뒤인 27일에는 국가 전방위적인 개혁을 위한 664개 조항의 개혁 법안(옴니버스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특단의 조치들이 즉각 시행됐다. 만성적 무역적자를 해소한다며 페소화를 50% 평가절하했고, 이전 정부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생필품 가격을 눌러놓았던 ‘공정가격’ 제도도 폐지했다. 이어 대중교통·공공요금 보조금 축소, 공기업 민영화, 정부 부처 절반 축소 및 공무원 해고 등 다방면에 걸쳐 파격적인 개혁이 빠르게 진행중이다.

남미식 포퓰리즘에 중독돼 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경제학자 출신 대통령이 처방한 ‘입에 쓴 약’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공무원들과 급등한 생필품 가격에 분노한 서민들이 거리로 나와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밀레이 행정부는 물러설 기색이 없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연간 140%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다. 국민 10명중 4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연간 재정적자는 GDP의 4%를 초과하고,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84.7%에 달한다. 밀레이 행정부는 올해 연말까지 GDP의 5%에 상당하는 규모의 정부지출을 삭감해 연간 재정적자를 ‘0’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 같은 밀레이의 경제 개혁을 감안해 오는 2024년 말 아르헨티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79.9%로 2017년 이후 6년 만에 80%선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문제는 파격적 개혁 과정에서 ‘하이퍼인플레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페소화 평가절하로 경상수지 흑자 전환을 노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원래 목표인 수출 증가보다 수입 물가 폭등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을 다시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지난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실제로 시장 자유화와 경제 회복 기대로 금융 시장은 들썩였지만 실물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식음료와 생필품 가격은 한 달 만에 세 배로 뛰었다.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 취임이후 일주일만에 쌀과 빵, 우유 등 주요 식료품 가격이 50% 급등했고, 기름값과 소고기값도 2주새 60~70%나 올랐다. 650페소이던 1.5L 콜라는 한 달 새 1700페소가 됐다.

지난 12월 11일 발표된 아르헨티나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월대비 12.8%, 전년 대비 160.9% 상승했다. 전달에 이어 지난 32년래 최고치를 연달아 경신한 것이다. 오는 12일 발표될 12월 CPI는 더 인플레가 심화돼 전월대비 26.1%, 전년 대비 213%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홍성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남미 팀장은 “농축산물과 원자재 같은 저부가가치 1차 산업 중심의 아르헨티나 경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과 같은 구조 개혁이 필수인데, 역대 정권들은 근시안적인 포퓰리즘 정책만 남발해 왔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국민들은 당분간 경제적 고통을 견뎌야겠지만 높은 빈곤율 해소에 앞서 밀레이가 추진 중인 긴축 정책을 통한 만성적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 해결이 더 급선무”라고 평가했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중독과 고통스런 극복 과정은 4월 총선을 앞두고 각종 선심성 퍼주기 정책이 쏟아지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극과 극의 운명으로 비교되곤 했다. 아르헨티나는 실패사례이고 한국은 성공사례로 꼽혔지만, 한국이 지금처럼 재정 건전화를 소홀히 하다가는 2030년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중이 아르헨티나를 넘어설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20년 예산안이나 추경 편성 시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60% 이내, 통합재정수지는 -3% 이내로 관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재정준칙을 발표했지만 국회에서 논의되지도 못한 채 계류돼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2021년 발표한 중기재정전망에 따르면 오는 2030년까지 적절한 지출통제와 세입확충이 이뤄졌을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최소 60.6%, 별다른 재정건전화 조치 없이 현상유지될 경우 최대 78.9%에 달할 전망이다.

IMF는 2028년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57.9%, 아르헨티나는 69.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도 재정 개혁에 나서지 않는다면 2030년경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아르헨티나를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서 아르헨티나는 직전 정부인 페론주의 성향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실업급여 2배 인상 등 복지 확대 정책과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10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 전국적 봉쇄·격리 조치로 인한 실물경기 충격으로 공공부문 부채 규모가 2019년 12월 3230억달러에서 작년 6월 말 4038억달러로 25%나 늘었다.

재정적자로 정부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중앙은행에서 화폐를 찍어내 지출했고, 그 결과 지난해 상반기 기준 아르헨티나 광의통화(M2) 공급량은 16조7000억페소로 집권 이전보다 6배 이상 늘었다.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공식 환율도 2019년 12월 달러당 59.87페소에서 임기 마지막달인 지난해 11월 달러당 360.48페소로 급등하며 페소값은 6분의 1토막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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