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강경희 기자 2024. 1.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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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독일의 천재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1858~1947) 평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 하나는 양자 역학이고,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최소 단위 중 하나인 양자를 발견한 사람이 플랑크다. 양자 역학의 기본 상수를 플랑크 상수라고 한다. 1905년 베른 특허청의 무명 공무원이던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 진가를 알아본 사람도 플랑크였다. 1914년 베를린대 총장으로 취임해 아인슈타인을 스카우트했다. 두 천재는 음악도 좋아해 함께 연주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막스 플랑크 협회는 독일만이 아닌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이다. 1911년 설립 당시 이름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다. 신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가 “독일의 강력한 두 지주는 군사력과 학문”이라며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연구기관을 세우자고 황제를 설득해 만들었다. 플랑크는 72세이던 1930년부터 이 협회 의장을 맡아 독일 과학계를 이끌었다. 나치가 유대인 아인슈타인을 공격하자 막스 플랑크는 “우리는 유대인들의 과학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려 했다.

▶막스 플랑크 협회로 이름이 바뀐 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넉 달 후인 1948년이다. 독일 패전 후 협회도 쇠락했다. 89세의 플랑크가 “개별 연구소들에 최고의 연구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 목표”라고 편지를 써서 독일 전역 연구소에 보내고 직접 강연도 다니며 재건했다. 그의 진정성 덕분에 오늘날 해외를 포함해 독일 전역에 86개 연구소를 산하에 두고 소속 과학자 6700여 명, 초청 과학자 2500여 명을 포함해 연구원과 직원이 2만4000명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 분야 빅텐트’가 됐다.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이 넘는다. 막스 플랑크 양자광학연구소장인 페렌츠 크러우스가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성공 비결은 ‘하르나크 원칙’에 있다. 황제를 설득해 협회를 만든 신학자 하르나크가 100여 년 전 세운 ‘연구의 독립성’ 전통이 이어진 덕분이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한 스타 과학자에게 해당 프로젝트 단장을 맡기고 인사권과 예산을 일임하면서 스스로 연구를 이끌어가게 하는 제도다.

▶차미영 KAIST 교수가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첫 한국인 단장으로 오는 6월부터 ‘인류를 위한 데이터 과학’이라는 하나의 연구 그룹을 이끈다고 한다. 자유롭고 차별 없는 연구 문화를 표방해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문호를 열어두는 이 연구소에 첫 테이프를 끊은 우리나라 과학자가 여성이라는 점도 뜻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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