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남자들은 크고 여자들은 작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 통념은 위계의 근거이자 오래된 차별의 수단이었다. 초등학생 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의 몸집이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남학생보다 성장이 빨라 키와 몸집이 큰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5학년 때 키가 165㎝까지 자란 나는 비슷한 몸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덩치는 또래보다 큰데 2차 성징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의 삶. 남보다 커다란 몸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오직 빨리 자란 나의 몸이 자랑스럽기만 한 여자아이의 짧은 한때. 그 시기의 나는 ‘무적’이었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괴롭혔다. 학기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담임이 바뀌고, 다니는 학교가 바뀌어도 저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어른들은 여학생들에게 그것을 ‘호감의 표현’이라 일렀다. 지겨운 괴롭힘에 여자아이는 울고 남자아이는 멀리 도망간다. 바로 그 순간, ‘덩치 큰’ 무적의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나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 남자아이의 옷자락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이 얼마나 짜릿한 대사인가. 내 말이 곧 법이자 질서이니 하찮게 죄를 묻지도 않겠다는 두목의 위엄. 반쯤 술래잡기처럼 까불대며 도망치던 놈들도 그 말 한마디에 몸을 늘어트린 채 항복을 외쳤으니 내가 서 있던 그곳이 바로 위계의 꼭대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에게 ‘무적’이나 ‘두목’이란 타이틀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무렵 전국 초등학교 교실에 있는 ‘두목 여학생’들은 의로움이나 파괴력의 정도와 관계없이 모두 ‘조폭 마누라’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 모두 2001년에 개봉한 영화 <조폭 마누라> 때문이었다. ‘조폭’이면 ‘조폭’이지 ‘조폭 마누라’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적’ 활동을 하며 애써 잡은 권위도 번번이 “조폭 마누라!”라는 빈정거림에 상하고 말았으니, 나의 명예를 더럽힌 그 영화를 내가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머리엔 줄곧 <야인시대>(2002)의 사운드트랙이 흐르고, 내 심장은 ‘긴또깡’ ‘시라소니’ ‘쌍칼’ ‘구마적’ 같은 이름을 원하고 있는데 고작 ‘조폭 마누라’라니.
은퇴한 종합격투기 선수 정찬성이 제작한 <좀비 트립: 파이터를 찾아서>에는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전국 각지의 ‘길거리 파이터’들이 등장한다. 200만, 300만 조회수를 기록한 이 콘텐츠 속엔 수많은 흥행 요인과 논란들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분별해내기도 전에 참가자들의 별명 앞에서 먼저 무릎을 꿇는다. ‘인천 파쇄기’ ‘순천 피바다’ ‘신림동 수면제’ ‘강릉 돌감자’…. 듣기만 해도 심장이 뛰는 엄청난 ‘파이터 네임’을 보라! 곧이어 이 무시무시한 남자들이 격투기 선수들과 스파링을 한다. 스텝으로 몸의 리듬을 만들고 주먹을 받으면 다시 주먹으로 되갚으면서. 그러나 프로선수를 상대로 그런 게 쉽게 될 리가 있겠는가. 열에 아홉은 치명타를 맞고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싸움을 포기한다. 앞서 허세 가득한 무용담을 늘어놓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좀비 트립>의 인기는 이렇게 모두 참가자의 허세와 위악에 대한 응징에서 비롯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초라한 실력에 실망하지만 동시에 안도한다. 타고난 신체가 아니라 오직 훈련된 정신만이 진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진짜 힘을 가진 자만이 힘의 허망한 속성을 안다. 아무리 거창한 이름을 붙인다 한들 컨트롤하지 못한 힘은 어설픈 위악에 불과하며 이것이 위계를 결정짓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 ‘조폭 마누라’는 중학생 때 은퇴한 ‘주먹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진정한 힘을 길러 더 이상 ‘시라소니’ 같은 이름을 부러워하지 않기 위해. 일단 줄넘기부터 시작하리.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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