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오늘] 우리의 ‘도서관’이 위태롭다
남미 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한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955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에 취임했다. 젊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독재자 후안 페론을 비판한 일로 해고당한 전력이 있는 그로서는 금의환향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명예직에 가까웠지만, 그는 19년 가까이 그 자리에 머물며 책 읽는 아르헨티나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은 1810년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와중에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사상과 지식의 보급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설립됐다.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것이 1816년이니 도서관이 먼저, 국가가 훗날 세워진 셈이다. 아르헨티나 하면 메시와 축구를 보통 생각하지만, 책과 도서관을, 하여 문화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국 지식정보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관장 자리가 2022년 9월부터 비어 있다. 2019년 여름, 정부는 전문성 강화를 위해 공모를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장에 외부 전문가를 처음 임용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이후 세 차례 공모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적격자 없음’이라는 결정이 났다. 모르긴 해도, 국립중앙도서관장을 꿈꾼 이들이라면 관련한 연구 성과나 실적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더 새롭게 꾸려보고 싶은 열정도 남달랐을 것이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니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저러니 많은 말들 사이에서 2월 설 전후로 관장을 임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개방형 관장은 한 번 통과의례였을 뿐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는 듯하다.
보르헤스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보르헤스는 유전적 원인으로 1927년부터 안과 수술을 무려 8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시력은 점차 나빠졌고, 국립도서관 관장직에 오른 1955년에는 거의 앞을 볼 수 없었다. 1950년대 후반 그는 완전히 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관장직을 10년 넘게 더 수행했다. 시력을 상실했지만 보르헤스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 종일 책더미 속에서 일했던 그는 집에서도 책을 읽었는데, 책 읽어주는 소년들 덕이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은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 알베르토 망구엘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한 서점 점원이었던 망구엘은 보르헤스의 부탁으로 4년 동안 밤마다 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망구엘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을 찾자면 ‘점자책’일 수밖에 없다. 지난 4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점자의 날’이었다. 시각장애인과 부분 시력장애인의 인권 보장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점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취지로 제정된 날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점자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는 게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 지난해 말 ‘서울점자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이 도서관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지자체 보조 등을 받아 31년간 운영했다.
하지만 이용객이 줄고 보조금도 줄면서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을 높였던 서울점자도서관은 폐관에 이르렀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가 없지 않지만, 서울점자도서관을 비롯한 대부분 점자도서관은 지금까지 민간이 운영을 도맡아왔다. 장기간 공석인 국립중앙도서관 관장 자리와 서울점자도서관 폐관은 별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톺아보면 이는 국민 삶의 질에 관한 진중한 물음이 담겨 있다. 책과 도서관은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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