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문뜩] ‘블루칼라 보난자’에 거는 기대
어학연수를 갔을 때 머물렀던 하숙집 주인은 항만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새 학생이 올 때마다 작업화를 보여주며 그 신발이 얼마나 비싸고 튼튼한 것인지 자랑하곤 했는데, ‘컨테이너 무게를 버틴다’던 그 신발 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가 받던 월급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한 달에 2~3주 정도만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비웠는데, 그럼에도 그의 임금 수준이 당시 한국 대기업 평균을 아득하게 넘는 숫자였던 것으로기억한다.
물론 그의 업무강도가 얼마나 세고, 경력이나 기술 수준이 임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블루칼라는 저소득이라는 막연한 고정관념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사실 한국은 한참 동안 많은 것들이 쌌다. 사람들은 ‘쥐뿔도 없는 우리나라가 그나마 인건비가 저렴해서 이만큼 버틴다’고 입을 모았다. 그게 노동, 특히 육체노동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으로 굴러가는 ‘조금 불공평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최저임금이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인건비 때문에 소상공인들이 죽겠다는 뉴스가 온·오프라인을 도배하고 나서도, ‘인건비’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주제였다. 인건비를 주는 주체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건비, 구체적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부담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은 비대면 주문이 폭주하던 코로나19 사태 때였다. 치킨을 시킬 때, 짜장면을 주문할 때도, 음식을 포장해오는 내 수고와 배달료를 지불하는 비용 사이에서 매번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팬데믹이 끝난 지금도 40만명 넘는 배달원이 전국을 누빈다. 춥고 덥고 위험한 일을 대신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보상을 지급할 수 있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도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시작한 셈이다.
블루칼라 노동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학력, 성별 무관의 생산직 400명을 뽑는 데 무려 18만명이 몰리고, 서점에는 소위 ‘킹산직’ 취업을 위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싹쓸이한다. 온라인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킹산직’에 합격한 이들의 수기가 올라오고, 반도체 공사현장에서 한 달에 몇백만원을 벌었다는 영상에는 수천, 수백개의 추천이 달린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지만, 육체노동이 재평가받는 이런 변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인구의 흑자시대가 끝나고 적자시대로 접어든다. 6년 뒤인 2030년 한국의 생산연령인구 전망은 2022년보다 257만명이나 적다. 특히 베이비붐세대가 고령인구로 이동하는 2020년대에는 연평균 32만명, 2030년대는 연평균 50만명씩 감소한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혁명으로 대체되는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화이트칼라에 더 빨리, 많이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고학력·고소득 근로자일수록 AI에 더 많이 노출돼 있어 대체 위험이 크다는 보고서를 내놨는데, 회계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의 대체 가능성이 높다는 게 골자였다. 반면 식음료 서비스 종사자나 운송 서비스 종사자의 대체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다.
“진단하는 의사가 붕대를 감는 간호사보다 AI에 더 대체되기 쉬울 것”이라는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의 전망과 맞닿은 분석으로,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이 같은 현상들을 종합해 ‘블루칼라 신바람’(Blue-collar Bonanza)이 돌아왔다고 주목하기도 했다.
물론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당장 물가의 상승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블루칼라 가구의 소득이 늘더라도 전반적인 소비 여력이 줄어들 테니 내수가 부진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이 블루칼라의 약진에는 응원하고 싶은 분명한 지점들이 있다. 단적으로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평생의 기대소득을 결정하고, 이 한번의 승부를 위해 가용한 모든 재원과 역량을 쏟아붓는 지금의 한국 사회는 특히 그렇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임금 격차가 줄어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는 것만으로도 이 비효율적인 소모전은 충분히 줄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해외에서는 최근 대졸자가 고졸자에 비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대졸 임금 프리미엄’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AI 혁명의 시대, 인재 육성이 지상과제라는 지금, 단순·반복 노동이 지금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블루칼라 보난자’를 조용히 응원하게 되는 배경이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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