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5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문해력을 ‘역사 리터러시’라고 지칭하고 틈나는 대로 그 규칙을 다듬어보는 중이다. 오늘은 그 규칙 제5조,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규칙 하나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바로 “역사에서 변화하지 않는 원칙은 딱 한 가지, 역사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명당 한양에 대해 짚어보겠다.
지금 서울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한양은 명당일까? 고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이 개경을 보완해줄 명당이라며 남쪽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남경으로 개창했다. 고려 말 사람들은 남경에 국왕이 머물러서 개경의 지덕(地德)을 왕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왕대·공양왕대에는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그 기세를 몰아 아예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반대가 거셌다. 황당한 건 바로 2년 전엔 한양이 명당이라고 한 사람들이, 이제는 한양에 문제가 많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뒤로 다 돌산이라 물 흐름이 길지 않아 사람이 끊긴다느니, 가장 좋은 땅은 개경이라느니 하면서 말이다. 간신히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몇년 만에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 정도로 한양의 초반 위상은 위태했다. 그러나 수도로 삼은 지 백 년쯤 지나자 분위기는 반전했다. 이제 아무도 한양이 명당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경주니, 평양이니, 개성이니 하는 이전 시대의 수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땅이라고 선언되었다. 18세기쯤 가면 한양이 어찌나 명당인지, 땅 빛깔이 깨끗해 바닥에 떨어진 밥톨도 주워 먹을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양 안에서 어디가 명당이냐는 부분은 논란이 지속됐다. 정도전은 고려인이 정한 백악 아래 궁궐터 남쪽의 평탄한 곳에 경복궁 자리를 잡았다. 한 세대쯤 내려온 세종대에는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경복궁 뒤편의 백악이 아니라 창덕궁 서편으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주산이라고 주장했다. 건국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이 일어나자 이런 논란은 더 증폭됐다. 잘못 잡은 주산 아래의 경복궁은 불길하고,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정작 조선 초 천도를 할 때는 산이 아니라 물길이 문제였는데, 이때는 아무도 물길 얘기는 하지 않고 산세만 문제를 삼았다. 이런 논란 속에 건설되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 경희궁과 동관왕묘(동묘)다.
또 200년쯤 지나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자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에는 더 이상 딴소리가 나오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웬걸. 30년 만에 초유의 황후 시해로 임금이 경복궁을 떠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경운궁(덕수궁)을 중창한 고종은 정문의 이름을 대한문이라고 바꾸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한양의 명당은 내가 있는 이곳, 경운궁이라고. 그러나 헛헛하게도 바로 나라가 망했기에 이런 선언은 아무에게도 각인되지 못했다.
이렇게 약 천 년의 한양 풍수에 대한 역사를 훑어만 봐도, 여기가 원래 명당인가, 이 안에서 진정한 명당은 어디인가 같은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이전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후에는 이렇게 저렇게 변화했다는 정도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 속성’ 같은 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래 그런 것’ ‘단절되지 않은 전통’ 같은 것을 욕망한다. 그 권위가 강력하기에 그 품에서 큰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 제5조를 적용해보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는 것일수록 사실은 얼마 안 된 것이거나 역사의 한 시점에 잠깐 불거진 현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또 전통을 들먹이는 사람일수록 전통 그 자체보다는 그 권위의 힘에 매료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코가 베이지 않는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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