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남북 정상의 ‘주적론’
주적(主敵)은 말 그대로 ‘주가 되는 적’이다. 논리적으론 적들이 여럿 있어야 주적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공식 문서에서 ‘적’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다. 어제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만도 중국을 ‘주요 위협’이라고 지칭할 뿐이다.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 특수관계”로 명시했다. 그러나 관계의 부침에 따라 ‘적’이 들락날락했다. 남한은 1994년 북한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자 1995년 국방백서에 ‘주적은 북한’이라고 처음 적시했다. 노무현 정부에선 ‘주적’을 삭제했고,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겪은 뒤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적’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특정하지 않고 ‘주권·국토·국민·재산을 위협·침해하는 세력’이라고 했다.
적에 대한 입장이 변한 건 북한도 마찬가지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남한을 주적으로 간주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2년 4월 “남조선은 우리의 주적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그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우리의 불변의 주적”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 정상들은 공개적으로 ‘주적’이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대선후보와 당선인 시절 ‘주적은 북한’이라고 거듭 말했다. 지난달 28일 전방 군부대를 방문해 “적의 도발 의지를 즉각 단호하게 분쇄해달라”고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8~9일 군수공장을 방문해 “대한민국 족속들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단정했다. 지난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동질·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교전국’이라고 규정하더니 “남조선 영토 평정” “초토화” 같은 호전적 언사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군통수권자인 남북 정상이 상대를 적으로 지칭한 것은 심상치 않다. 9·19 군사합의 무효화 이후 우발적 충돌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남북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투 코리아’로 가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한반도에서 평화를 뒷전에 놓을 수 없다.
안홍욱 논설위원 a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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