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의혹 배우 보기 싫다"...공연 통째로 취소시킨 관객들 '도덕성 파워'
성폭력 방조 논란 배우 캐스팅 보이콧...
연극 '두 메데아', 개막 열흘 전 전격 취소
사생활 논란 배우 출연엔 극장에 반대 민원
"성폭력 등 전력 배우, 캐스팅서 배제 추세"
"이런 식으로 무대에 계속 서도 되나요. 진심으로 범죄 사실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은 성범죄 가담자가 뻔뻔하게 연극 판에 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달 31일 한 연극 관객이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의 파장은 컸다. 글이 겨냥한 것은 극단 연희단거리패 전 대표인 배우 김모씨. 그가 캐스팅돼 이달 19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공연될 예정이었던 극단 서울공장의 연극 '두 메데아'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글은 수십 회 공유됐고, 지난 6일 연극인들의 '두 메데아 보이콧' 공동 연명 성명으로 이어졌다. 600명이 넘는 연극인과 관객들이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씨의 단원들 상습 성추행이 폭로되는 등 공연계를 '미투 운동'이 강타했던 2018년 초. 김씨는 이 극단의 대표였다. 이씨의 성추행 인정과 동시에 김씨가 극단 해체 뜻을 밝힌 뒤 김씨가 이씨의 성추행을 묵인·방조했다는 폭로가 연달아 나왔다. 김씨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입건되지는 않았다. 김씨 측은 "경찰로부터 '이윤택 사건과 관련하여 공모 또는 방조혐의 등을 발견할 수 없어 형사입건하지 않았고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가 극단 이름을 바꿔 일부 단원들과 공연을 계속해온 것에 분노하는 성추행 피해자와 연극인들이 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극단 이름을 바꾼것이 아니고, 후배들이 연출을 부탁하여 다른 극단에서 공연을 했을 뿐이다"라고 밝혀 왔다.
역시 연희단거리패 출신으로 최근 단원 상습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는 부산의 한 교육극단 대표가 이 연극에 그래픽디자이너로 참여한 것도 불을 질렀다. 연극인과 관객들이 집단적으로 '두 메데아 보이콧' 목소리를 내면서 극단 서울공장은 공연을 취소한다고 9일 발표했다.
"어렵게 얻은 안전한 창작 환경 지속돼야"
이번 공연 취소 사태는 법적·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배우에 대한 관객의 저항감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연극은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보이콧에 참여한 연극인과 관객들은 "공공기관인 서울문화재단이 대관 심사를 허술하게 하고 서울공장의 대응이 안이했다"고 비판했다. 서울문화재단은 제작진 명단은 받지 못한 채 공연 관련 자료만 보고 대관 심사를 했다고 해명했다. 서울공장은 논란이 된 그래픽디자이너만 제작진에서 제외한 채 연극을 진행하려다가 결국 물러섰다.
보이콧을 주도한 배우 하지은은 "연극인과 관객은 안전한 창작 환경, 안전한 작품을 원한다"며 "2018년 성폭력 문제 공론화로 진통을 겪으며 힘겹게 얻은 안전한 창작 환경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연장에 배우 하차 민원 넣는 관객들
최근 공연 관객들은 수동적인 관람자에 그치지 않고 배우와 제작자의 도덕성에 대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목소리를 낸다.
지난해 4월에는 사생활 논란이 있었던 배우 A씨의 국립정동극장 기획 공연 출연 소식에 관객들이 공연장에 캐스팅 변경을 요구하는 민원을 넣었다. 공연은 이 극장의 기획 시리즈 '창작ing' 중 한 편이었다. 공연은 그대로 진행됐지만 극장은 올해부터 '창작ing' 작품 공모 지원 기준에 "관련 규정, 법률 및 지침 위반 행위자는 지원할 수 없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A씨는 이후 캐스팅된 민간 제작사의 뮤지컬에서도 관객의 보이콧 움직임에 하차했다.
해외에선 이미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2020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여성의 나체를 불법으로 촬영한 사진을 동료 무용수들과 돌려 본 뉴욕시티발레단의 무용수 아마르 라마사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캐스팅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관객 보이콧, 티켓 판매 등으로 즉각 영향 미쳐
'두 메데아' 공연 취소 결정 이후에도 보이콧 참가자들은 활동을 계속할 방침이다. 이들은 6일 1차 성명을 낸 데 이어 10일 극장과 극단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2차 성명을 냈다. 하지은은 "처음부터 공연 취소가 목적이 아니었다"며 "성폭력 가해자들의 현장 복귀 시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객이 엄격한 잣대로 공연 창작진과 출연진을 바라보면서 공연 제작자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한 뮤지컬 제작사 대표는 "시청률로 피드백을 받는 방송 제작 환경과 달리 공연은 티켓 판매 등을 통해 관객의 보이콧이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며 "배우들의 작은 논란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널리 퍼지는 시대인 만큼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배우는 되도록 캐스팅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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