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日왕궁에 폭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을 기억하며
100년 전 1월 5일 일왕 폭살 기도 불발됐지만 일제 간담 서늘케 해 무기징역 언도 받고 44세로 옥사 의거, 기억하고 간직해야할 교훈지난 1월 5일은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 왕궁 정문인 니쥬바시(二重橋)에서 폭탄을 던져 민족의 의기를 널리 알린 날이다. 정확히 100년 전 일어난 역사적 의거다. 그는 무슨 연유로 그 곳에 폭탄을 던지게 되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시계 추를 100년 전 1월로 되돌려 본다.
1924년 1월 7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1월 5일 오후 7시 조선 사람 한 명이 동경 궁성(宮城) 이중교(二重橋) 밖에서 배회하는 것을 보고 경관이 수상히 여겨 누구냐고 물은 즉, 그 자는 폭발탄 같은 것을 가졌다가 집어 던졌으나 폭발은 되지 아니 하였고 범인은 즉시 경관과 보초병에게 체포되어 히비야(日比谷)경찰서로 압송하여 엄중히 심문 중인데, 별로 연루자는 없는 듯하고 이러한 행동을 한 목적은 아마 세상을 소동케 하려는 것인 듯하며, 이 범인은 최근 모처로부터 들어온 것인 듯 하더라. 이 사건은 그 외에도 동경으로부터 도착한 전보가 있으나 경무당국으로부터 게재 금지의 명령이 있으므로 다만 이상의 내무성 공표만 게재함."
이 사건은 그해 4월이 돼서야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김지섭이었다. 김지섭은 누구이며, 그가 폭탄을 던지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해주는 192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폭탄 범인 김지섭은 1884년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유교(儒敎) 교육을 받아 사서삼경에 통하였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共鳴)하여 현재의 모든 제도를 부인하는 급진적 사회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다. 그는 엄친시하(嚴親侍下)에서 어릴 때부터 글방에서 한문을 전공하여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향교의 교관(敎官)까지 지내게 되었다. 대한제국 말년에 시세가 차차 변하여 감에 한문 글자만 읽고 앉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 일본말 공부를 시작하여 1908년에 금산(錦山)재판소의 서기로 임명되어 새 생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기미년(己未年) 운동이 돌발하자 당시에 칼을 물고 자결한 금산 군수 홍범식(洪範植;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의 최후를 보고 무엇을 뜻하였는지 그 후로는 유달리 혈기방장한 친구들을 널리 사귀게 되어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밀양 사건의 곽재기(郭在驥), 황옥 사건의 김시현(金始顯) 등과도 당시부터 교분을 두터이 하였었다. 이후 상해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드나들던 김지섭은 상해로 건너가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당시 상해에 머물던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고바야시 카이(小林開)와 함께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즉시 동경(東京)에 이르러 기회를 보다가, 마침내 니쥬바시 부근에서 폭탄 소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니 때가 바로 1924년 1월 5일이었다."
김 의사는 이른바 '황옥경부사건'(黃鈺警部事件)과도 연관되어 있다.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22년 4월경 김지섭은 우선 조선 안에서 파괴적 사업을 행하고자 조선 내지에 폭탄을 수입하기를 계획하고 1923년 3월 경에 조그마하게 생긴 폭탄 30개(살인하는데 쓰는 것), 크게 생긴 폭탄 6개(집을 깨트리는데 쓰는 것)를 상해에서 천진으로 수송하였는데,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중국 단동)과 신의주 사이의 국경의 경비가 극히 엄중하여 용이하게 조선 내지에 수송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시 경기도 경찰부 경부(警部) 황옥(黃鈺)을 중간에 넣어 동지 김시현, 유석현 등과 함께 신의주에서 두어 명의 기생을 불러서 유흥을 한 후, 그 폭탄의 일부를 기생이 돌아가는 길에 인력거 속에 감추어 국경의 경비를 돌파하고, (중략) 폭탄의 일부분은 황옥 자신이 이를 휴대하고 경성으로 가져왔다. 그리하여 3월 15일에 기어코 일을 시작하려다가 발각되어 황옥 등 13명은 잡히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 의사는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로 피신했다. 의열단은 일본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도 일본인과 닮은 김 의사를 일본에 보냈다.
김 의사는 의회가 휴회 중이어서 계획을 수정해 왕궁에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일본인이 숭배하는 황성(皇城) 부근에서 폭탄을 던지어 관민을 놀라게 해서 울적한 분을 풀리라 생각하고, 그날 도쿄시(東京市)의 지도를 사들여 히비야 니쥬바시 우메다몬(梅田門) 부근에서 배회하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마침 지나가던 구경꾼 두 사람과 동행처럼 차리고 니쥬바시에 가까이 왔는데, 순사가 누구냐고 묻기 때문에 순사를 향하여 폭탄 한 개 등 총 3개의 폭탄을 던졌는데 폭발치 아니하였고. 드디어 위병(衛兵)에게 체포된 것이다."
김지섭은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폭탄이 중국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습기를 먹어 불발이 된 것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조선 청년들을 무료 변론해왔던 저명한 좌파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김 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후세 다쓰지는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1925년 8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8년 2월 20일 오전 8시 30분 지바(千葉)형무소에서 44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일제가 화장해 버린 유골을 수습해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안치했다.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김 의사가 옥중에서 동생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 네 통은 모두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100년 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져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풀려고 했던 김지섭 의사의 의거는 모두가 기리고 간직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 100년 전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눈 많이 내리고 찬 바람 쌩쌩 부는 1월, 김 의사의 넋을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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