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날씨를 알려줄게

2024. 1. 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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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이사하면서 세운 한 가지 방침은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장면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막이 상황을 설명해버렸고, 복잡한 화면 구성은 숨이 찰 지경이었다.

'오늘 날씨 최고 기온 2도. 최저 영하 12도까지 내려간댄다. 눈도 내릴 건가 봐. 잘 입고 잘 신고 출근해.' 언니는 대뜸 전화를 걸어 커다랗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비 엄청 많이 온대! 우산 들고 나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지 소란한 지글거림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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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이사하면서 세운 한 가지 방침은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다채로움에 빠져 책 읽는 시간이 부쩍 줄어든 탓이었다. 동시에 천천히 감정을 쌓아가던 나만의 속도를 되찾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나보다 빨랐다. 내가 장면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막이 상황을 설명해버렸고, 복잡한 화면 구성은 숨이 찰 지경이었다. 나는 내 속도에 맞춰 모든 것을 오롯이 감각하고 싶었다. 책 속의 문장들을 고요히 덧그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세계가 조밀하고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텔레비전이 사라진 뒤 내게는 세 개의 우산이 생겼다. 털장갑과 하얗고 보들보들한 목도리도 하나 생겼다. 아침마다 습관처럼 틀어놓던 뉴스와 일기예보가 사라지니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날씨의 변덕도 한몫했다. 어느 날은 봄날처럼 바람이 순했고, 어느 날은 혹한에 얼어붙은 공기로 콧속까지 얼얼했다. 나는 터무니없을 만큼 무방비한 꼴로 우산도 장갑도 없이 걷곤 했다. 세상에,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준비성이 좋을까. 나는 너무 춥거나 더운 거리에서 뻣뻣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부비며 생각했다. 나만 빼고 다들 우산이 있네. 거리를 위협하듯 우르릉대며 급작스레 폭우를 퍼붓는 하늘에 혼자 억울해했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날씨가 좀 그렇지. 아무 때나 비나 눈이 쏟아진다니까." "이게 다 기후위기 때문이야. 너 분리수거는 제대로 하고 있니?"

다음날부터 내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아침 일찍 엄마와 언니에게서 오는 연락으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우산이 증식되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예보관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내게 일기예보를 전했다. 엄마는 이른 새벽 뉴스를 본 뒤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적어넣은 메시지를 내게 보내왔다. '오늘 날씨 최고 기온 2도. 최저 영하 12도까지 내려간댄다. 눈도 내릴 건가 봐. 잘 입고 잘 신고 출근해.' 언니는 대뜸 전화를 걸어 커다랗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비 엄청 많이 온대! 우산 들고 나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지 소란한 지글거림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럼 나는 가방을 챙기고 그날 입을 옷을 골라내면서 두 사람의 말을 이어붙였다. 최저 영하 12도를 견딜 만한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고, 신발장에서 튼튼한 우산을 꺼내 쥐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는 대개 따뜻하고 안전했다.

그러므로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휴대폰 음성 안내로 오늘의 날씨와 주요 뉴스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나를 걱정하는 다급하고도 상냥한 마음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어쩌면 일기예보의 시작 자체가 그랬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춥거나 덥지 않기를, 어느 누구도 비에 젖지 않기를 바라는 다정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오늘 비 온대, 우산 챙겨. 그러면 나는 조금 맹꽁한 목소리로 그래, 알겠어, 하고 대답한 뒤 이미 챙겨 나온 우산 손잡이를 꽉 쥐어보는 것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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