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민원⑭ 과거 판결문 "청부민원은 용납 못할 심각한 비리"
뉴스타파는 가족이나 지인 등을 동원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에 민원을 넣게 하는 이른바 '청부 민원'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비리"라고 판시한, 과거 방심위 '청부 민원' 사건 법원 판결문을 입수했다. 이 판결은 과거 방심위 간부 A씨가 '청부 민원'을 했다가 해고된 뒤, 중앙노동위원회와 방심위를 상대로 낸 행정 소송의 1심에서 나왔다. 2심과 대법원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방심위는 다른 기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공공성이 요구되는 기관이다. 따라서 '청부 민원' 혹은 '대리 민원'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의 민원 제기는 방심위에 대한 대외 신뢰도를 악화시키는 심각한 비위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청부 민원' 의혹을 받는 류희림 방심위원장은 공익제보자를 색출하기 위한 특별 감찰을 지시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등 적반하장식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류 위원장의 '청부 민원' 의혹이 권익위에 신고되고, 그 내용이 보도된 이후 방심위 심의 행정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지만, 류 위원장을 임명한 윤석열 대통령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법원 "청부민원은 방심위의 핵심 가치 훼손하는 결코 용납 못할 비위 행위"
2018년 3월, 방심위는 A 팀장을 파면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자료에 따르면 A 팀장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6년 동안 제3자의 명의로 '대리 민원' 46건을 신청했다. 이 민원들 가운데 19건은 법정제재, 14건은 행정지도 결정이 내려졌다. A 팀장은 내부 감사 과정에서 "당시 위원장이나 부위원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소문으로만 돌던 '청부 민원', '셀프 심의'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방심위 인사위원회는 재심을 통해 A 팀장에 대한 징계 수위를 '해고'로 낮췄다. 하지만 A 팀장은 해고가 무효라면서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 잇따라 제소했다. 그러나 각 노동위원회는 모두 해고가 정당하다고 봤다. 그러자 A 팀장은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피고는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피고의 보조 참가인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2019년 12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은 A 팀장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때 법원은 지인과 가족을 동원해 민원을 내게 하는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해서 일침을 가했다.
'청부 민원', '대리 민원'과 같은 행위는 '방심위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공공성을 크게 훼손하는 행위로서, 참가인(방심위)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종류의 비위 행위에 속한다고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A 팀장의 행위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방심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저하된 점, 정치적이지 않은 민원이 포함됐지만 이 또한 민원 제기 방법이 비정상이라는 점 등이 방심위 신뢰도를 악화시킨 심각한 '비위 행위'라고 판시했다.
법원 "방심위는 방송사의 공적 책임을 심의하므로 높은 수준의 공정성·공공성 요구"
판사는 "참가인(방심위)은 방송법 제32조에 따라 '방송 등이 제공하는 정보가 공정성·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공적 책임을 준수하고 있는지 여부'를 심의·의결하는 기관인 바, 다른 기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공정성·공공성이 요구된다"고도 적시했다. 또, 민원 내용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청부 민원' 행위 자체가 방심위에 대한 대외 신뢰도를 악화시킨다면서 이례적으로 강경한 단어들을 사용했다.
실제로 방심위가 법정 제재를 내리면 방송사는 방송평가와 면허 재허가 심사에서 큰 불이익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위는 다른 행정기관보다 훨씬 높은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심위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심의에 나서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원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내부 공익제보자들 보호 조치 시급
A 팀장은 재판에서 "인사상 불이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급자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고, 청부 민원은 오랫동안 이어진 방심위의 관행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법원은 "A 팀장이 거짓 민원을 꾸며내라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었고, 단순히 지시에 따랐다거나 관행에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면서 "참가인(방심위)의 존재 목적과 자신의 임무를 분명히 깨닫고 잘못된 지시를 거부했어야 했으며, 부당한 관행이 있다면 이를 앞장서서 철폐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면서 강한 어조로 꾸짖었다.
이 판결이 나오고 4년 뒤, 당시보다 훨씬 대규모로 조직적 '청부 민원'이 단기간에 동시다발로 실행된 의혹과 관련해서 류희림 방심위원장은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류 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방심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별 감찰반을 꾸려 내부 제보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고, 위원회 명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지난 8일 열린 새해 첫 전체회의에서 야당 추천 방심위원들은 위원장의 사과와 해명, 업무 배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내부 감찰이 진행 중으로 언급하지 말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전체회의 중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등 황당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튿날 열린 방송심의소위원회도 파행으로 끝났다.
류 위원장이 받고 있는 '청부 민원'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는 법원 판결문에 나온 것 같이 '가족과 지인을 동원한 청부 민원으로 방심위가 결코 용납해선 안 될 심각한 비위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이자 '방심위의 대외 신뢰도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된다. A 팀장은 해고됐지만, 류희림 위원장을 해촉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뉴스타파 봉지욱 b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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