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 강한 피노 누아 … 제맛 즐기려면 '숙성 시간'이 중요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피노 누아 5년 이상 기다려야
초반 신맛, 풍부한 맛으로 변해
변호사로 잘나가던 톰 베이커
와이너리 '토마스 조지' 설립
"바로 팔지않고 시간 들이는 건
돈만 생각하면 큰 모험이지만
소비자 입장서 와인 만들고파"
미국 뉴욕에 거주할 때 부르고뉴 그랑크뤼 밭에서 막 출시된 피노누아를 사서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큰마음을 먹고 수백 달러를 주고 샀지만 어린 '피노누아'의 강렬한 산미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습니다.
레스토랑에서 피노누아를 시켜본 소비자들도 한 번쯤은 마주쳤을 경험일 겁니다. "와인의 최고봉은 피노누아라고 하던데 왜 이렇게 시기만 한 거야."
피노누아를 마실 때마다 '애증'의 감정을 느낍니다.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갔지만 결국에는 실망하는. 기대했던 피노누아의 맛이 아닌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소믈리에가 있거나 와인에 대한 깊이가 있는 레스토랑은 마시기 좋은 피노누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레스토랑의 피노누아는 마시기에 너무 어린 경우가 많습니다. 잘 숙성된 고급 피노누아의 가격대가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선한 피노누아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급 피노누아 와인일수록 어느 정도 숙성돼야 그 본연의 복합미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그와 동시에 어렸을 때 짱짱한 산미를 갖추고 있어야 숙성되면서 제대로 된 피노누아의 본질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랑 똑같이 생각하는 와인 생산자를 인터뷰하게 됐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러시안리버 밸리에 위치한 토마스 조지 에스테이트의 설립자 톰 베이커 씨입니다.
톰 베이커 씨는 저 같은 소비자를 위해 '피노누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생산한 피노누아 와인을 바로 파는 게 아니라 '시음 적기' 때까지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가지고 있다가 충분히 숙성시킨 뒤 맛이 좋을 때 순차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겁니다.
보통 와인 전문점에서 고급 피노누아를 구매하면 같은 와인 6병을 사라고 조언합니다. 충분히 숙성됐는지 매년 한 병씩 마셔보면서 시음 적기를 찾아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처럼 참을성 없는 소비자는 그렇게 6년을 기다리기가 힘듭니다. 토마스 조지 와인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셈입니다.
톰 베이커 씨에 따르면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까지 포함한 평가단이 매년 병입된 와인을 맛보고 '적기'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출시된 와인이 2017년 빈티지입니다. 토마스 조지의 '크레스타 리지(Cresta Ridge)' 피노누아 2017과 '베이커 리지(Baker Ridge)' 피노누아 2017이 그 주인공입니다.
최소 5년 이상은 숙성돼야 제대로 된 '피노누아'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톰 베이커 씨의 철학입니다. 그는 자신의 와인을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톰 베이커 씨는 "토마스 조지가 출시한 피노누아 와인은 지금 마시기 좋은 와인이다. 이제부터는 마셔도 좋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마실 수 있는 시점에 소비자에게 와인을 판매한다는 건 사실 간단한 방법 같지만 와인 생산자 입장에선 큰 모험입니다. 오랜 기간 자본이 잠기기 때문입니다.
와인 업계에선 자본 회전을 빨리하기 위해 엉 프리미어(En primeur)라고 하는 '선물시장'도 형성돼 있습니다. 와인을 병에 넣기도 전인 오크통 숙성 단계에서 와인을 판매하는 겁니다.
선물 투자를 하는 입장에선 자기자본으로 구입하는 게 아니고 금융권에서 융자를 받아 와인을 미리 사게 되는데 이때 보통 기준점이 되는 대출금리가 리보(LIBOR)라고 하는 런던은행 간 금리입니다. 이렇게 오크통 숙성 단계에서 구입한 와인이 몇 년 뒤 병에 담겨 출시됐을 때 최소한 금융이자 비용보다는 가격이 더 올라줘야 투자자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와인 생산자가 이런 금융 리스크를 떠안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와인 생산은 기본적으로 '농업'입니다. 해마다 기후변화 등 각종 변수가 많아 가능한 한 금융 리스크를 헤징(hedging)하기 위해 엉 프리미어라고 하는 선물시장도 생겨난 겁니다.
와인 사업에 뛰어들기 전 톰 베이커 씨는 변호사였습니다. 인수·합병(M&A) 전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금융지식'을 몰라서 돈을 수년간 와인통에 잠가두는 게 아닙니다.
평소 와인을 좋아했던 그는 데이비스 바이넘(Davis Bynum)에게서 2008년 포도밭을 인수합니다. 바이넘은 캘리포니아 러시안리버 밸리를 최고의 와인 산지로 끌어올린 '개척자'로 불립니다.
여러 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들던 관행에서 벗어나 러시안리버 밸리에서 피노누아 단일 품종으로 최고급 와인 생산에 도전했습니다. 톰 베이커 씨는 바이넘의 유산을 이어간다는 계획입니다.
그는 "와인을 사업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와인을 사랑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와인을 만든다. 그래서 내 와인을 마시고 다른 소비자들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소비자로서 와인을 만든다'는 말이 마음에 참 많이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톰 베이커 씨에게 물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태양이 좋다. 기후가 좋아서 카베르네 소비뇽도 오랜 숙성 기간이 필요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는 걸 만드는 게 캘리포니아 와인의 특징 아니냐."
실제 제가 할란 이스테이트 2019년 빈티지를 마셔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할란 2019년 빈티지는 2018년 빈티지보다도 더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톰 베이커 씨는 '포도 품종'이 다르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좋은 캘리포니아라도 피노누아라는 포도품종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
그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수확 후 바로 마셔도 맛있게 만들 수 있다. 그건 카베르네 소비뇽이 근육질의 머슬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노누아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피노누아는 엘레강트하다. 층층이 복합미가 녹아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피노누아 와인을 말하면 아무래도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누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부르고뉴 피노누아와 비교해 달라고 했습니다.
톰 베이커 씨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누아와 비슷한 와인을 만들기보다는 부르고뉴 피노누아처럼 테루아를 반영한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 빈티지부터는 여러 포도밭의 포도를 섞는 대신 단일 포도밭, 단일 구획에서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합니다. 이 역시 각 테루아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조치입니다.
와인 양조기술이 발달하면서 와인 비평가의 입맛에 맞춘 와인이 많이 출시되고 있습니다. 숙성 기간을 짧게 하기 위해 강제로 산화를 시킨다거나 오크칩을 써서 오크향을 내는 등의 방법이 있습니다. 테루아를 강조한 와인은 가능한 이런 '기술'을 적게 사용합니다.
그의 테루아에 대한 철학은 샤르도네에도 반영됩니다.
톰 베이커 씨는 "깨끗한 샤르도네를 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캘리포니아 샤르도네는 오크 숙성과 젖산 발효를 통해 특유의 버터향과 빵 복합미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베이커 씨는 "샤르도네는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숙성하거나 프렌치 오크를 사용해도 새 오크통의 비중을 적게함으로써 깨끗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소위 '화장하지 않은 와인'과 같다"고 소개했습니다.
토마스 조지의 화이트 와인으로는 100% 오크통 숙성인 크레스타 리지 샤르도네와 스테인리스 숙성인 손스 앤드 도터스(Sons&Daughters) 샤르도네가 한국에 출시됐습니다. 베이커 씨는 "자녀들에게 와인은 마케팅이 아닌 정직이 최고라고 조언한다"면서 "정직하게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인터뷰였고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김기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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