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 김대중’ 민환기 감독 “이 영화가 대단한 일을 하진 않겠지만···내 안의 ‘열망’ 봤으면”[인터뷰]

최민지 기자 2024. 1. 1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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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연출한 민환기 감독이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1987년 9월 8일, 광주 금남로는 수십만 명의 인파로 가득찼다. 16년 만에 광주를 찾은 제13대 대선 후보 김대중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열렬한 환호, 뜨거운 눈물로 김대중을 맞이했다. 김대중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광주를 찾지 못한 사이 두 번의 해외 망명과 납치 살해 미수, 사형 선고, 5년이 넘는 수감 생활을 겪었다. 특히 7년 전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스러져간 광주 시민을 떠올린 김대중은 이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굴곡진 생애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10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수십 만 인파에 둘러싸인 김대중의 얼굴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영화는 1924년 전남 신안의 작은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성공한 청년 사업가가 됐다가 정치인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김대중 3부작’의 문을 여는 영화는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동력 삼아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메가폰을 잡은 민환기 감독(56)을 지난 3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민 감독이 제작사 명필름으로부터 연출 제의을 받은 것은 2022년 초였다. 망설여졌다. “전작 <노회찬6411>이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재미있었지만 힘들었거든요. 또 정치인 다큐멘터리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해 11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망설이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 1987년 광주 방문 장면이었다. 민 감독은 환한 김대중과 광주 시민의 얼굴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민 감독은 제13대 대선이 치러지던 1987년 당시 대학 1학년이었다. 그 역시 민주화 세력이 군부 독재를 끝낼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에 실패했고, 12·12 군사반란 주역 중 한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환멸과 절망이 그를 찾아왔다.

“상처를 받았어요. 그게 꽤 오래갔습니다. 그런데 제작사가 보내준 광주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형식적인 환영이 아니었어요. 김 전 대통령도 형식적으로 환호에 답하는 표정이 아니었고요. 다른 정치인의 얼굴에서 보지 못했던 표정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를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그 분에게 가졌던 편견이나 의구심은 사실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고 그건 아마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영화 속 김대중은 합리적인 토론과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회주의자이자 필요하다면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이다. 민 감독은 ‘과격한 선동가’나 ‘투사’가 아닌 ‘정치인’ 김대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투사와 정치인은 다릅니다. 투사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자신과 주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정치인은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죠. 가장 놀라웠던 건 김 전 대통령이 정치를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토론을 중시했고, 언제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분의 여러 정치적 행보가 납득되더라고요.”

미국으로 망명한 뒤 해외에서 입지를 다져가던 김 전 대통령이 1985년 귀국한 것이나 철천지 원수인 전두환에 대한 용서 등은 모두 ‘정치인’ 김대중의 선택이었다는 게 민 감독의 생각이다.

<길위에 김대중> 의 한 장면. 김대중은 타고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명필름 제공
<길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의 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돌아온 그가 광주를 찾은 1987년 9월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명필름 제공

민 감독은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봐주기를 바랐다. 김대중이 16년 만에 광주를 찾은 장면이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시민들의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연설 중인 김대중을 바라보는 시민의 얼굴에서는 ‘열광’이 아닌 ‘열망’이 읽혔다.

“정치인들에게 열광하던 시대가 있었잖아요. 그 열광은 어떤 열망이 있어서였겠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열망에 대해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이 내 안의 열망은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건지 스스로 질문해봤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을 것 같거든요.”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총 3부작까지 제작될 예정이다.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 당시를 그린 2부 <기호 2번 김대중>은 현재 제작 중이다. 민 감독은 그 중 마지막 <길위에 김대중 2>(가제)의 연출을 맡는다. 3부는 1987년부터 대통령 당선 이후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연출한 민환기 감독이 3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민 감독은 정치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잇달아 연출했다. <청춘 선거>(2021) 역시 2018년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녹색당 고은영 후보와 선거캠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이른바 ‘정치 고관여층’일까. 대답은 의외로 ‘아니오’였다.

“정치나 정치인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매력적이긴 하죠. 정치인들은 저 같은 보통 사람처럼 단순한 삶을 살지 않잖아요. 나 하나 먹고 사는 걸 넘어 다른 사람에게 나의 비전을 제시하고 또 설득하고요. 제 삶과는 거리가 멀어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긴 하지만요.”

민 감독의 다음 관심사는 청년, 그 중에서도 정치판에 뛰어든 청년들이다. 그는 “아직은 조금 궁금한 정도”라면서도 “청년 정치인들이 보는 지금 세상이 얼마나 희망적이고 또 절망적인지 양면을 들어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 “김대중 정치사상·철학 핵심은 ‘행동’ ‘양심’ ‘용서’”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1101530011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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