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였는데 ‘이야기’가 됐슴당

류석우 기자 2024. 1. 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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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신문·방송으로 보도한 기사를 소설 형식으로 다시 쓰면서 실험하는 기자·피디들…
신문과 방송 보도를 위한 기자들의 취재물이 웹소설 플랫폼과 추리문학 잡지 등으로도 독자를 만나고 있다. 관련열쇳 말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제공하는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모델 ‘달리’(DALL-E)로 만든 일러스트.

“지난해 11월17일 오전 수원지방법원, 김미나(33)씨가 법정에 들어선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2023년 3월4일치 <경향신문> 지면에 실린 기사의 첫 문장이다. 고양이 학대범을 쫓는 애묘인 김미나씨 이야기를 다뤘다. 3개월 뒤 계간지 <계간 미스터리> 여름호에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 학대범을 쫓는 김미나씨에 관한 내용은 같지만, 작법이 달랐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삼색이 고양이가 하얀 세탁망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기존에 쓴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시 써서 발표하는 이들이 있다. 실화를 소재로 한 논픽션을 만드는 웹소설·웹툰 기획사 ‘팩트스토리’는 <계간 미스터리>와 함께 이미 보도된 사건과 인물을 더 인간적이며, 넓고 깊게 다른 앵글로 다루는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가 기존 기사를 발굴해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서 써서 실어보자고 제안했고, 한국추리작가협회도 이를 받아들였다. 2023년 여름호에 처음 전현진 <경향신문> 기자가 쓴 ‘길고양이 킬러를 추적하다’가 실렸다. <계간 미스터리>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발간하는 추리문학 전문 잡지다.

기사를 더 인간적으로 바꿔본다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문학 장르는 팩트스토리가 만드는 핵심 장르 중 하나예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나 넷플릭스 시리즈 <애나 만들기> 등도 기자가 쓴 논픽션에 기반했거든요. 한국추리작가협회도 이런 실화에 기반한 범죄 논픽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셨고요.” 고나무 대표가 말했다. 고 대표는 2022년 드라마(SBS)로 만들어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 논픽션 저자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 교수와 함께 써서 <한겨레21>에 연재했고, 책(알마 펴냄)으로도 출판했다.

고 대표는 국내 1호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 교수와 함께 쓰고, <한겨레21>에 연재 뒤, 책(알마 펴냄)으로 묶고, 2022년 드라마(SBS)로 만들어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저자다.

첫 주자로 참여한 전현진 기자는 이전부터 ‘다르게’ 쓰는 방식을 고민해왔다. “저는 글재주가 있거나 단독 기사를 잘 쓰는 기자가 아니거든요. 취재력이 뛰어나지도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매일 마감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 기자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기사를 썼다. 법원을 출입할 때 한 유명 연예인의 음주운전 선고가 있었다. 대다수 언론이 유죄 판결 소식을 전할 때, 그는 그 연예인의 팬에게 주목했다. 선고 이후 법정에서 나오는 연예인에게 사인해달라는 팬의 이야기를 기사에 썼다.

평소 내러티브 논픽션에도 관심이 많았던 전 기자는 회사 뉴콘텐츠팀에 합류해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뉴스레터나 유튜브 등 기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만나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팀에서,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해보겠다는 포부였다. 뉴콘텐츠팀에서 다뤘던 기사 중 하나가 고양이 학대범 추적기다.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의 긴 기사였고, 취재도 많이 해놨지만 이를 다시 <계간 미스터리>에 맞는 장르로 바꾸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면을 만들어 보여주는 일이었다. “논픽션이든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에는 장면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몇 가지 장면을 크게 구성해놓고, 그 장면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썼던 것 같아요. 해설하지 않고 보여주는 식으로요.”

왼쪽부터 <계간 미스터리> 2023년 여름호·겨울호, <삼성동 하우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류석우 기자

논픽션 쓰기 위해 디테일 추가 취재

“궁금한 게 있어서 메시지 남깁니다. 노란색 동그라미 친 것은 똥인가요, 지방인가요?” 

김미나는 이 사진을 올린 인스타그램 사용자에게 물었다. 순전히 호기심이 인다는 듯한 태도였다.

“새끼.”

―‘길고양이 킬러를 추적하다’ 중에서

구체적이고 몰입도 높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전 기자는 추가 취재를 했다. 동물학대범과 김미나씨가 에스엔에스(SNS)에서 나눈 대화를 받기도 하고, 직접 학대범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이전 인터뷰 때 들었던 김씨의 설명을 막상 장면으로 묘사하려다보니 더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존 기사에는 없던 장면들이 등장했다.

구성과 흐름도 기사와는 정반대였다. 기사에서 시작은 학대범을 법정에서 만나는 장면이었지만, <계간 미스터리>에 실린 글에선 가장 뒷부분에 배치됐다. 김씨가 처음 학대범의 존재를 알게 되고(발단), 찾으려고 노력했다가(전개), 한계에 봉착했지만(위기), 결국 실마리를 찾아내 포항의 한 폐양어장에서 학대범을 잡고(절정), 재판으로 이어지는(결말) 구조다. 학대범을 잡는 순간의 장면이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다. 전 기자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취재해 세세하게 장면으로 보여준다.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겨울호에 실린 ‘J의 몰락’은 팩트스토리가 기획한 두 번째 내러티브 논픽션이다. 이 글은 <뉴스타파>의 ‘죄수와 검사’ 보도 시리즈가 원작이다. 보도에 참여한 김새봄 피디가 ‘죄수와 검사’ 시리즈 두 번째 기사인 ‘죄수-수사관-검사의 부당거래’ 편에 등장하는 죄수 조아무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집필했다. 고나무 대표가 기사를 보고 먼저 브로커 역할을 하는 죄수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고, 기사로 풀어내지 못한 부분에 아쉬움이 있었던 김 피디도 이에 응했다.

“사건이 벌어진 걸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 얘기를 듣게 되잖아요. 듣다보면 ‘이런 국면에서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됐구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사건에 대해서만 담백하게 써야 하는 상황이 많다보니 (기사에 쓰지 못한) 이야기가 쌓이더라고요. 이런 것을 언제쯤 한번은 꼭 논픽션 형태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좀더 재미있게 읽히는 이야기로요.”(김새봄 피디)

‘죄수와 검사’는 <뉴스타파>가 2019년 8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세 시즌에 걸쳐 보도한 탐사보도물이다. 보도 이후엔 400여 쪽에 이르는 동명의 책으로 엮어 출간까지 했다. 탐사보도물의 특성상 상세하게 보도됐고 책까지 나온 상황이었지만, 고 대표는 별도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빈 부분을 주목했다.

김 피디와 고 대표는 브로커 ‘조씨’라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J라는 사람의 백그라운드를 더 찾아보려 했어요. 처음으로 죄수의 신분이 됐던 사건이 무엇인지 찾았고요. 당시 보도에 담지 못했던 판결 내용도 반영했습니다.” 김 피디가 말했다. 그렇게 ‘J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계간 미스터리>에 조씨를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 논픽션이 실렸다. 글은 대학 시절 화려했던 조씨의 이력에서 시작해 다시 조씨의 이야기로 끝난다.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겨울호에 실린 ‘J의 몰락’은 <뉴스타파> 보도 ‘죄수와 검사’ 시리즈가 ‘원작’이다. <뉴스타파> 유튜브 갈무리.

“제2의, 제3의 J가 나와야 합니다.”(2006년 11월5일, 조회수 3290)

2006년 11월5일, 밤 9시11분, 디시인사이드 성균관대 갤러리에 한 편의 글이 게시된다. 평범한 결혼 축하로 시작된 게시글은…”

―‘J의 몰락’ 첫 단락 중에서

“J의 사진이 한 장 있다. 최초의 비운동권 학생회장에다 최초로 재선에 성공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J. (…) 미소를 짓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는 승리했다. 두 번이나.”

―‘J의 몰락’ 끝 단락 중에서

김 피디가 고민했던 건 J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리나 욕망 같은 것을 어떻게 내러티브 논픽션으로 풀어낼지에 대해서였다. 추측이 가능하다고 그 생각까지 직접 쓰면 소설처럼 보이게 될 것이 걱정됐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J라는 인물이 재판 과정에서 낸 진정서 등이었다. 중간중간 J라는 인물을 J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와 진술조서 등을 활용해 설명했다.

숨어 있는 인물 찾고, 인물 중심으로 다시 쓴다

고나무 대표는 내러티브 논픽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장면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새봄 피디의 글을 보면 빌런만 나오거든요. 수사관도 죄수도 검사도 빌런인 악인전 같은 글인데, 기존 스토리에선 이 (조씨라는) 사람이 왜 브로커 역할을 했는지가 흐릿했어요. 그래서 회의하며 이 사람에게 좀더 집중해서 써보자고 했고요. 핵심은 주인공이 빌런이든 좋은 사람이든 인물 중심으로 리라이팅(기사를 다시 쓰는 것)한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디테일에 대해선 전 기자가 쓴 글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고양이 학대 사건은 사실 단독 기사도 아니고 여러 언론이 썼던 기사거든요. 저희가 리라이팅 과정에서 초점을 맞춘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학대범을 잡는 순간이었어요. 학대범을 누가 잡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존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잘 나오지 않아요. 민간인이 생업도 바쁜데 길고양이 학대범을 어떻게 잡았을까, 이런 게 디테일이에요. 기존 스트레이트 기사에 잘 드러나지 않는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있어요. 이 부분을 부각했더니 재미있는 논픽션이 됐죠.”

기존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시 써서 문학잡지에 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처음부터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쓰는 시도는 이전부터 많이 있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기자 시절에 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부터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김동진),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등처럼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끈 작품도 많다. 전현진 기자는 최근 동료 기자 4명과 함께 국내 내러티브 논픽션 장르를 개척해온 이야기꾼 12명을 인터뷰해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22년 12월 출간된 <삼성동 하우스>다. 이 책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성매매 의혹을 보도한 김경래 전 <뉴스타파> 기자가 쓴 ‘소설’이다. 분명 형식은 소설이지만, 읽다보면 201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사가 떠오른다. 소설은 취재기자들부터 성매매 영상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일당까지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말 그대로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송경화 <한겨레> 기자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 단독 보도한 ‘대통령의 올림머리’ 등 기사에 다 담지 못한 취재기를 바탕으로 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등을 출간했다. 이런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결국 그 보도를 다시 찾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김경래 전 <뉴스타파> 기자의 소설 <삼성동 하우스>를 보면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성매매 의혹 보도가 연상된다. <뉴스타파> 유튜브 갈무리.

메시지를 더 매력적으로 전달하는 방법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 기사의 문법을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이어진다는 것만큼은 명확하다. 고 대표가 있는 팩트스토리는 <계간 미스터리>와의 협업 외에 전현직 기자들과 영화나 드라마화를 목표로 논픽션 출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정도는 알려졌지만 더 알려져도 좋을 사건과 인물을 한 번 더 알리는 효과가 있고요. 공적인 메시지를 더 매력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목표예요. 공적 메시지를 걷어내더라도 영화 <서울의 봄>처럼 그 자체로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두 번째 목표고요. 취재와 기사가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하거나 다른 스토리 시장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활용되는 건 앞으로 더 커질 산업이라고 봅니다.”(고나무 대표)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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