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 '잘린 손' 이어주며 세계적 '손 외과의사' 배출
"1983년 고려대구로병원 개원 후 구로공단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손가락이나 손목이 잘린 환자들이 밤낮없이 밀려와 거의 매일 수술실이 24시간 가동됐다."- 대한수부외과학회 30년사-
대한수부외과의 역사는 1970~1980년대 한국 경제의 가파른 성장의 어두운 뒷면과 궤를 같이한다. 김우경 전 수부외과학회 이사장(고려대)의 회고록에서도 언급됐듯이, 당시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열 손가락 전체가 잘려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프레스를 비롯한 각종 공장기계를 만지다 사고를 당하는 이들이 크게 늘자 1983년 박노해 시인은 '손 무덤'이라는 시를 발표했을 정도다. 구로공단 곁의 고려대 구로병원은 수많은 환자가 몰려와 백세민, 김수신, 김우경으로 이어지는 '수지 미세수술의 산실'로 이름을 떨쳤다.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몰려들면서 이 병원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수부외과 의사들 수요가 크게 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료 현장에서 환자들의 잘려나간 손가락과 손목을 잇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수부외과 전문의들의 수준은 높아졌다. 국제 학회에서 우리 의사들이 발표하고, 외국 의사들이 박수 치는 일이 하나둘씩 늘었다.
이처럼 초창기 수부외과는 손 외상에 무게가 실렸다. 이후 점차 영역을 넓혀 완관절(손목)과 주관절(팔꿈치)까지 포함하는 상지 외과로 확대했다. 나아가 기술 발전과 함께 골관절(뼈마디), 건(힘줄), 신경, 혈관 등의 다양한 조직과 질환을 다루는 학과로 성장했다. 미세수술은 1960년대 현미경 혈관 문합술이 도입되면서 미세접합술이 가능해졌고, 이후 신체 모든 영역의 재건술로 범위가 넓어졌다.
최근에는 절개하지 않고 1cm 미만의 작은 구멍으로 기구(관절경)를 넣어 관절 속 손상된 부위를 모니터로 보면서 치료하는 관절경 수술도 손목과 팔꿈치 분야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다.
올해 출범 42년...외과 유일 세부전문의 제도 시행
대한수부외과학회는 1982년 10월 출범했다. 정형외과와 성형외과에서 굵직하게 이름을 남긴 25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초대 회장은 우리나라 장애인 재활사업의 대부로 꼽히는 문병기 연세대 교수가 맡았다.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정규 정형외과 전문의 수련을 받고 귀국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정형외과를 외과에서 분리 창설한 주역이기도 하다.
이후 1987년 성형외과 의사로만 구성된 대한수부재건외과학회가 만들어졌다. 초대 회장은 박길용(국립의료원), 이사장에는 이영호 서울대 교수가 선출돼 첫 학술대회를 서울 워커힐에서 개최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초창기 성형외과 분야에 수부외과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대한수부외과학회는 2003년 대한수부재건외과학회와 통합하면서 학회 명은 그대로 유지하고 이사장 제도로 정관을 바꾸었다. 초대 이사장은 탁관철 연세대 성형외과 교수. 창립 당시 총 46명의 정회원으로 출범한 수부외과학회는 정회원 1128명, 준회원 619명이 활동하는 중견학회로 성장했다. 탁 전 이사장은 "당시 두 학회의 통합 문제는 찬성과 반대 의견이 분분한 어려운 숙제였다"면서도 "학문 발전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두 과가 뜻을 모았다"고 회고했다.
학회는 2005년부터 대한의학회에서 인증하는 수부외과 세부전문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외과계열에서는 유일하다. 1년 여 준비기간을 거쳐 제도 실행을 위한 규정과 일정을 입안하고, 10명으로 구성된 수부외과 세부전문의 관리위원회를 가동해 제도를 완성했다.
2005년 수부외과 세부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160명이었다. 당시 심사위원회와 이사회의 심사를 거쳐 경력 8년 이상에 200점 이상 평점을 이수한 회원 109명은 서류심사로 전형을 통과했고, 51명은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쳐 수부외과 세부전문의 인증서를 받았다.
올해 기준으로 세부전문의는 281명이다. 인증서를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5년마다 자격을 갱신해야 하는데, 학회 참석 횟수와 논문, 학회 발표 횟수 등이 충족돼야 한다. 섬세한 수부 분야에서 전문적이고 높은 진료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깐깐한 규정을 둔 것. 수부외과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자격증을 취득하고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세부전문의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수가 계산 등에서 차별화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학회 노시영 홍보이사(광명성애병원 성형외과 과장)는 "수부외과는 성형외과와 정형외과에서도 매우 다루기 힘든 영역에 속한다"면서 "수가 혜택은 없지만 수부외과라는 자부심으로 자격증을 따고 유지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자부심에만 기대기에는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전문지식을 더 쌓은 의사들에 대한 적합한 대우가 필요하다고 노 이사는 덧붙였다.
'수부외과 올림픽' 치러내며 국제적 학회로 우뚝
만성질환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접합수술 등 응급 상황에서 능숙한 수부외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다. 골든타임 안에 전문의를 만나면 사라질뻔한 손가락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수부외과학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응급상황을 대비해 전국에 있는 수부외과 세부전문의와 근무병원, 전화번호를 검색할 수 있게 해놓았다.
대한수부외과학회는 글로벌 학회로 가는 길에서 가장 앞쪽에 선 곳 중 하나다. 빠르게 성장한 국내 수부외과학의 성과를 알리고 국제적 교류를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0년 개최한 제11회 세계수부외과학회(IFSSH)는 수부외과학회가 이뤄낸 대표적 성과다. 1998년 백구현 교수(서울대 정형외과)를 비롯한 12명의 회원이 직접 마련한 2500만원으로 시작한 IFSSH 유치 활동은 이후 6년이 지난 2004년에 값진 열매를 맺는다. 당시 학회는 IFSSH 집행부를 맡았던 외국의 여러 교수를 국내로 초청한 데 이어 물론 국내 교수들이 직접 외국으로 날아가 홍보 활동을 벌인 끝에 11회 IFSSH를 유치했다.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당시 IFSSH에는 전세계 60개국에서 1300여 명의 수부 전문 의사들이 참석했다. '수부외과학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IFSSH를 성황리에 치뤄내면서 대한수부외과학회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올라갔다.
이에 앞서 2002년 수부외과학회는 세계 3대 수부학회 중 하나인 아시아태평양수부외과학회(APFSSH)를 열면서 국제학회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학회는 한국, 일본, 호주 등 아·태 지역 12개 국가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이후 탁관철 교수와 백구현 교수가 APFSSH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회 내 학회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대한수부외과학회는 2027년 다시 한번 APFSSH를 연다. 개최지는 부산이다. 이 행사의 공동의장을 맡은 한수홍 이사장(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은 "수부 분야의 수술기법은 현재 한국이 최고"라며 "아·태 지역 전문의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지식 습득과 전파는 물론 한국의 문화, 의료 알리기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윤은숙 기자 (yes960219@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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