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요리 과정을 분자 단위로 계량…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의 요리로 재창조[살아있는 과학]

노성열 기자 2024. 1. 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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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과학 - 분자요리
‘맛의 비밀’ 과학적으로 연구
페란 아드리아의 ‘에스푸마’
재료의 잠재된 매력 찾아내
식탁이라는 무대 위에 올려
스페인 카탈루냐 레스토랑 ‘엘부이’의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만든 ‘에스푸마(espuma)’를 활용한 요리.

오늘은 실전 요리 ‘분자 요리’의 첫 번째 코스입니다. 오래된 전통 요리가 아니라 최신 분자 요리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현대 과학의 흐름을 가장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은 진화합니다. 현재 득세하는 주류 집단은 조금 지나면 과거와 전통이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참신한 도전자들이 떠올라 이윽고 주역이 됩니다. 요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열과 압력으로 굽고 찌고 졸이는 가열요리법, 효모 등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이 전통적인 조리의 테크닉이라면 현대 요리는 보다 다양한 과학적 수단을 총동원해 새로운 맛과 질감을 창조해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분자 요리(molecular gastronomy)’입니다.

과학사 관점에서 보면 분자 요리는 전통 생물학을 분자 수준으로 마이크로 다운사이징해 분석하는 분자 생물학의 탄생과 궤를 같이합니다. 살아있는 유기 개체의 장기-조직-세포 단계를 연구하던 생물학은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한 대발견에 발맞춰 20세기 말 분자 생물학, 정보 생물학으로 진화하죠. 유전이란 생명 현상이 DNA 염기서열의 정보 복제임이 드러나자 생물학은 갑자기 화학과 수학의 융합 학문으로 깊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리의 세계에서도 일부 물리·화학자들이 부엌으로 쳐들어가 ‘분자 나이프와 포크’로 요리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실험실에서나 쓸법한 비커와 플라스크, 스포이트, 액체질소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뒤 맛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연구했습니다. 분자 미식학이란 단어가 생겨나게 된 배경이죠. 분자 요리는 20세기 후반 유럽 지역의 일부 식당에서 처음 출현해 한때 전 지구촌의 미식가 입맛을 사로잡다가 지금은 다소 열기가 식은 듯합니다. 하지만, 식재료와 요리 과정을 분자 단위로 계량·분석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음식이 아닌, 매우 다른 형태와 질감 등 새롭게 변형된 요리로 재창조하는 분자 요리의 과학적인 도전 정신은 모든 셰프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철학적으로 모든 기존 관념을 해체한 뒤 새롭게 재조합함으로써 내면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탈(脫)구축(deconstruction) 정신을 닮았다는 찬사까지 들었죠. 분자 요리의 초기 정신도 ‘고전 요리와 전통 조리법의 고정 관념을 깨고 재료와 레시피의 각 요소를 분해한 후 다시 조합해 과거와 다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 요리를 재해석해 새로운 질감과 형태의 요리로 창조해내는 ‘모던 퀴진(modern cousine·현대 요리)’의 총아로 꼽혔습니다.

분자 요리업계에서 나타난 스타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있던 레스토랑 ‘엘부이’의 셰프 페란 아드리아였습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 요리는 식자재로 만든 식용 거품인 ‘에스푸마(espuma)’입니다. 생크림이나 달걀흰자를 거품 내 만든 서양의 전통 조리법 중 하나인 무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산화질소가 충전된 소다 제조기에 식자재를 넣고 쏘면 거품으로 변합니다. 완두콩이나 허브를 거품으로 탈바꿈시켜 조리한 요리는 미식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드리아 셰프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자극하며 뇌를 깜짝 놀라게 하는 요리”를 표방했습니다. 기발하고 실험적인 그의 분자 요리를 두고 ‘재료 모독’ ‘과학 겉핥기’란 비판도 많았으나, 아무도 모르던 재료의 잠재된 매력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 식탁이란 무대에 올린 용기는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됩니다. 1997년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았고, 2006년부터 4년 연속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1위에 올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식당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2011년 문을 닫고 2014년 엘부이 재단으로 변신했습니다. 아드리아 셰프는 흥미롭게도 과학자와 비슷한 3가지 원칙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첫째, 개발한 모든 조리법을 조건 없이 공개하는 오픈소스 방식을 택했습니다. 둘째, 몰려든 젊은 요리사들끼리 팀을 이루게 해 집단지성을 유도해냈습니다. 셋째, 요리와 과학의 융합처럼 새로운 맛을 위해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투명·개방과 공유, 협업, 융합 등 21세기 시대정신을 앞서 음식의 세계로 도입한 선견지명이 돋보입니다.

또 한 명의 스타는 영국 런던의 서부 버크셔 지방 레스토랑 ‘팻 덕’의 셰프인 헤스턴 블루먼솔입니다. 팻 덕은 2004년 미슐랭 가이드 최고점인 별 3개를 획득한 데 이어 2005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1위로 선정됐습니다. 블루먼솔은 자신의 주방을 실험실로 부르며 ‘다감각 요리’를 내세웠습니다. 예를 들어, 해산물 요리를 서빙할 때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아이팟을 나눠주며 청각과 미각의 조합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는 대학교수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조리과학 분야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매우 학구적인 요리사로 꼽혔습니다. 또 한 사람의 스타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농업연구소의 에르베 티스 연구원입니다. 그는 1992년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와 함께 제1회 분자 물리 가스트로노미 국제워크숍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분자 가스트로노미(미식학)란 신조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티스 연구원은 이에 대해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메커니즘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작업을 정의했습니다. 그는 아드리아 셰프와 달리, 단지 맛난 요리를 창조할 뿐 아니라 맛있는 요리에 숨겨진 과학적 규칙을 찾는 데 주력하기도 했습니다.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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