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책방골목 “인자 도태되는 거 아이겠나…”

김영동 기자 2024. 1. 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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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12일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 모습.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전국 프리즘] 김영동 | 영남데스크

1993년 3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영어 기초를 닦기 위한 참고서가 필요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추천하는 친구의 말을 좇아 강제적인 자율학습을 마친 뒤 부산 중구 국제시장 근처 보수동을 찾았다. 전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절판된 책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밤에도 여러 책방에서 걸어둔 전깃불 덕분에 골목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딱 하나 남았다는 헌책방 골목인 보수동 책방골목의 첫인상이다.

고서를 찾는 어르신부터 소설책을 찾는 30대, 애니메이션 관련 화보를 찾는 20대, 중학생 딸과 함께 참고서를 고르는 40대 등 책을 찾는 사람들로 좁은 골목길이 넘쳐났다. 책을 사려면 골목길을 따라 만들어진 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골목길 가운데쯤 있는 책방에서 정가의 반값에 가까운 영어 참고서를 마음속으로 ‘찜’한 뒤 다른 책방들을 둘러보고 돌아오니, 찜한 참고서는 누가 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이 책방, 저 책방 둘러보다 결국 조금 더 낡은 참고서를 겨우 살 수 있었다. 이후로도 종종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아 다양한 책을 샀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았던 고등학생에게 이곳은 보물창고와 마찬가지였다.

2014년 12월 국제시장 관련 취재로 거의 20년 만에 보수동 책방골목을 다시 찾았다. 70여곳에 달했던 책방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문을 닫거나 다른 책방과 합쳐진 상태였다. 책을 사려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여러 언론에서 소개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덕분인 듯 일부 관광객이 인증사진을 찍는 모습만 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뒤 90년대까지 고서, 소설, 참고서, 전공 서적, 만화 등 다양한 책을 구하려는 사람으로 넘쳐났던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썰렁한 모습이었다.

“이젠 (헌)책도 온라인으로 판다 아이가. 옛날맨치로 사람들이 책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돈도 안 되니깐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제. (내가) 힘에 부치면 그냥 그만두는 거지. 인자 도태되는 거 아이겠나.” 한 70대 책방 주인의 말에서 상실감이 느껴졌다.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 세워진 아테네 학당 건물. 김영동 기자

보수동 책방골목 쇠락은 계속됐다. 2021년 책방골목에서도 규모가 크고 10만권 이상 책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책방 3곳이 있는 건물이 팔렸다. 책방골목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에 시민과 교사, 학생, 전문가, 상인 등이 자발적으로 모여 책방골목의 상징성과 보존, 미래를 위한 포럼을 진행했다. 이에 감동한 부동산 개발업체 대표는 자신이 사들인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3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거장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티마이오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 책을 형상화했다. 대표는 화가를 섭외해 건물 내부 천장에 벽화 ‘아테네 학당’을 재현했다. 책방골목 활성화를 위해 이윤을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경영난으로 건물 유지조차 불투명한 지경이라고 한다.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 세워진 아테네 학당 건물 천장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벽화가 재현된 모습. 김영동 기자

부산시는 2019년 보수동 책방골목을 ‘부산 미래유산’으로 지정했고, 중구도 2004년부터 해마다 이곳에서 문화축제를 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자체의 형식적인 지원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부동산 개발이 진행되며 책방이 헐리는 등 책방골목 정체성이 흔들릴 위기에 처했지만, 사유재산이라 어쩔 수 없다고만 했다.

“노르웨이는 산악 지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각종 지원을 해줍니다. 관광객이 그 경치를 보러 오는데,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고 떠나면 관광 자산이 사라지죠. 이처럼 지자체도 ‘문화를 판매한다’는 생각으로 책방골목을 지원해야 합니다.” 책방골목 브랜드화에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윤태원 경성대 교수(글로컬문화학부)의 말이다.

보수동 책방골목만의 차별적인 매력을 키우기 위해 지금이라도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그 첫발은 지자체가 뗄 수밖에 없다. 부산시와 중구가 주축이 돼 전문가, 시민, 상인 등과 머리를 맞대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말이다.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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