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얼굴엔 소라가 붙어 있었다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김봉규 기자 2024. 1. 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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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 묘역이라지만 묘비도 없는 야트막한 야산이 전부였다.

소나무들 사이 펼침막에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 치듯 돌아들 가소서'라는 시구가 쓰여 있었다.

1942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동원할 전사 확보와 도심 부랑아 일소 및 갱생을 명분으로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선감학원'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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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의 기억

경기도 안산. 묘역이라지만 묘비도 없는 야트막한 야산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흙을 아주 낮게 덮었는지 봉분이 낮아 맨땅과 구분이 어려웠다. 소나무들 사이 펼침막에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 치듯 돌아들 가소서’라는 시구가 쓰여 있었다. 위령제에는 나잇대가 비슷한 생존 피해자 14명이 참석했는데, 다른 참석자들과 섞이지 않고 한쪽 편에 굳은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2018년 12월31일 경기 안산시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터(150여구 추정)에서 12살에 선감도에 끌려왔다는 피해생존자 김성환(1956년생)씨를 만났다. 김씨는 선감도에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중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친형을 만나는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섬이었던 선감도 나루터에 다다르자 그는 “(경기도 화성) 마산포에서 선감도 가는 배를 기다릴 때 서너살 위 애들은 냅다 도망쳤어요. 그때 목숨 걸고 도망갔어야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봉규 선임기자

1942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동원할 전사 확보와 도심 부랑아 일소 및 갱생을 명분으로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선감학원’을 설립했다. 선감학원은 해방 뒤에도 불특정 아동을 법적 근거도 없이 강제로 연행해 격리하는 수용시설로 운영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최소 4691명이 누적 수용되었던 선감학원에서 아동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고문, 구타, 영양실조와 성폭력에 못 이겨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 및 실종, 상해에 이르는 등 지속적인 인권침해에 노출되었다”고 밝혔다.(‘2021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수용연령은 초등학교에 다닐 7~12살이 41.9%, 중·고교에 다닐 13~17살이 47.8%였다. 상당수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사실상 납치한 경우였다. 중학교에 진학한 원생은 놀랍게도 6명에 불과했다. 선감학원 입소자 치유프로젝트 참가자들 심리검사 결과, 이들 상당수는 화와 수치심, 죄책감 등의 정서적 어려움을 느끼고 불면증, 자살 충동. 우울증, 공황장애와 낮은 자존감 등 정신적 질환에 고통받고 있었다.

부랑아나 사회적 하층민 같은 특정한 사회적 유형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국가가 이들을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박해하는 행위는 “국제법상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진화위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5·16 군사정부는 부랑아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청소의 대상으로 여겼다.”(경기도의회 ‘선감학원 사건 진상조사 및 지원방안 최종보고서’(2017))

장애인인터넷언론 ‘비마이너’ 하금철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폭력의 아동 인권침해를 넘어 빈곤층에 대한 제노사이드 또는 조용한 학살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부랑아로 지목된 가난한 소년들을 범죄의 원천으로 여겨 사회에서 격리해 집단 자체를 사실상 절멸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이 건강하고 우월한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 불결하고 위험한 유대인을 향해 ‘최종해결책’을 가했던 저 나치의 역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강제로 끌려와 학대 끝에 탈출을 시도하다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진화위는 전체 아동의 17.8%인 834명이 선감학원에서 탈출했다고 집계했지만 “선감학원이 설립된 1942년에서 폐쇄된 1982년까지 40여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소년이 죽었는지, 그들이 누구였는지와 매장 관련 기록이 없어 문서를 통한 사망자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갯벌은 걷는 것 자체가 힘들고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익사한 원생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운 좋게 탈출해도 주민들에게 붙잡혀 강제노동하거나, 다시 선감학원으로 돌려보내지는 경우도 많았다. 9살 때 선감학원에 강제로 끌려왔다던 고 이대준씨는 기자와 만나 “14번이나 탈출을 시도한 끝에 살아서 선감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들려주었다.

2017년 11월8일 처음으로 선감학원 현장을 찾았다. 희생자 유해가 많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선감동 산37-1 묘역(배꼽산) 사전 조사 작업에 착수하며 위령제가 열린 날이다. 묘역이라지만 묘비도 없는 야트막한 야산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흙을 아주 낮게 덮었는지 봉분이 낮아 맨땅과 구분이 어려웠다. 소나무들 사이 펼침막에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 치듯 돌아들 가소서’라는 시구가 쓰여 있었다. 위령제에는 나잇대가 비슷한 생존 피해자 14명이 참석했는데, 다른 참석자들과 섞이지 않고 한쪽 편에 굳은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진화위는 2022년 9월26일 150여구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감묘역에서 유해 시굴 작업에 나섰다. 매장터 한쪽에선 10살 때 끌려왔었다는 선감학원 피해자 이주성(당시 62)씨가 리본에 ‘미안해, 미안합니다’라고 쓴 노란 국화바구니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앉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승용차에 올라 창문을 닫고 한참을 더 울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내 손으로 친구와 동생 또래 5명을 이곳 매장터에 묻었습니다. 탈출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친구들이었어요. 새벽에 떠내려온 친구의 팔과 얼굴에 소라가 들러 붙어있어 그걸 떼어내니 빨갛게 부어오른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눈물 젖은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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