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길 물속은 알아도[편집실에서]
현존 유럽 최장수 군주인 마르그레테 2세(83) 덴마크 여왕이 새해를 앞두고 한방을 터뜨렸습니다. 생방송 신년 연설 도중 돌연 퇴위를 선언해 국내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거지요. 차기 국왕 자리는 그의 장남인 프레데릭(55) 왕세자가 물려받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생전 양위는 없을 거라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난해 허리 수술 여파 등 건강 악화가 덴마크 왕실의 공식 발표입니다만, 속보나 분석기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합니다. 무엇이 그에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지요. 게다가 베일에 싸인 왕실 속사정입니다. 신뢰와 권위가 존재 이유요, 겉으로 비치는 이미지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실의 특성상 이양 배경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짐작 가는 구석은 있습니다.
승계 1순위 맏아들의 불륜 스캔들이 지난해 11월 불거졌습니다. 두 아들을 둔 덴마크 여왕, 차남 요아킴(54)과는 사실상 의절 상태입니다. 2022년 9월 왕실 개혁 과정에서 요아킴과 별다른 상의도 없이 그의 아들·딸 왕실 칭호를 전격 박탈해버린 데 따른 후폭풍이었죠. 반대로 프레데릭 자녀의 왕자·공주 지위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큰아들에게 모든 걸 걸었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후계를 준비하라는 기대와 달리 외도설이 터지다니, 방치했다간 자칫 왕실의 도덕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생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웃나라를 보면 군주제에 대한 여론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대표적 왕정국가인 영국의 지난해 4월 BBC 방송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밝힌 응답이 58%로 나왔습니다. 18세 이상 24세 이하 청년층의 찬성률(32%)은 특히 낮게 나타났습니다. 즉위 1년 4개월 만에 벌써 찰스 3세(75) 국왕의 양위론이 솔솔 나오고 있습니다. 1000년 역사의 덴마크 왕실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천년만년 영원하라는 법은 없죠. 30대 초반에 왕위를 물려받아 52년의 재위 동안 국민에게 다가가는 소탈하고 친근한 행보, 엄격한 자기 절제와 공사 구분으로 덴마크의 상징이자 왕실의 대표로 국민의 찬사를 받아온 여왕조차 늘그막엔 뭔가 획기적이고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 겁니다.
무릇 순순히 물려주는 권력은 없습니다. 반환점도 돌기 전에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진 국민의힘 상황도 그렇습니다. 잼버리 파행, 강서구 재보궐선거 패배,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이준석 신당 출범, 명품백 수수, 양평 고속도로 특혜 시비, 시시각각 조여드는 쌍특검 등 내우외환의 결과로 한동훈이라는 새 얼굴이 등장했습니다. 그렇다고 윤석열 대통령에서 후계구도로 완전히 넘어갔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생물학적 나이 외에 뚜렷한 차별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데다 이들 간에도 아직까진 주도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한창이니까요. 당내 인사들이 결국 어떤 줄에 서느냐, 나아가 민심이 모든 걸 결정할 겁니다.
권재현 편집장 ja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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